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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이 Apr 08. 2021

테이블, 야자

불어 터진 뿌리와 바짝 마른 잎

나에게는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작은 테이블 야자 화분이 있었다. 물도 잊지않고 주었고 햇빛도 많이 보여주었지만 아껴주는 마음과 달리 테이블 야자는 날이 갈수록 잎이 바짝 말라갔다. 

동네에 식물 병원이라 불리는 곳을 찾았다. 사람이 아닌 식물이 가는 병원이라. 생경했지만 귀여운 곳이다. 간판도 걸려있지 않은 작은 화원에는 털이 복슬복슬한 예쁜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이며 반겨 주었다. 화원 안에는 수수하지만 멋스러운 식물들이 가득했다. 구김살 없이 성장한 부잣집 막내 같이 식물들은 여기저기 자유롭게 가지들이 뻗어있었다. 세상 이곳저곳을 배낭 하나 들쳐 메고 방랑하지만 결국 돌아올 따뜻한 집이 있는, 작은 일에도 꺄르르 웃지만 직설적이고 당찬 막내. 싱그럽고, 젊고, 생기가 넘치는 부잣집 막내말이다.

마치 노지에서 거친 비바람을 맞고 자란듯 행세하지만 멀찌감치 그들을 보살피는 보호자가 늘 그들 곁에 있다.  


나의 테이블 야자를 살펴보던 식물 의사 선생님은 '과습'이라는 병명으로 진단하셨다. 

"과습이라뇨? 이렇게 입이 마르는데..."

"뿌리에서 물을 흡수 못해서 과습 때문에 뿌리가 많이 상했어요. 

  보세요. 뿌리고 이렇게 갈라지잖아."


탱탱 부은 물속의 살처럼 불은 뿌리는 하얗게 일어나고 갈라져 있었다. 

병든 뿌리가 물을 흡수하지 못해 잎이 말라갔던 것이고 어리석게도 계속 물을 주었던 것이다. 

대화할 수 없는 식물을 잘 살피지 못해 결국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회생불능입니다." 

테이블 야자의 사형선고를 받았다. 곧 나의 테이블 야자는 쓰레기통을 향했다. 허옇게 드러난 퉁퉁 부은 뿌리와 바짝 마른 잎이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으로 향해 버졌고 나는 잠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길에서 우연히 본 영주를 알아보지 못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주는 맑고 밝았다. 하얗고 작은 얼굴,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예쁘장한 이목구비, 무엇보다 영주는 늘 작은 일에도 꺄르르 웃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웃을 때면 주변이 밝아지는 듯했다. 따뜻하고 싱그러웠다. 그리고 모두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의 미소를 사랑했다. 


"요즘 병원에 다녀. 정신과."

여전히 나아지지 않은 현실과 전염병으로 더 악독해진 상황까지 영주를 짓누르고 있었다. 불어 터진 뿌리가 물을 흡수하지 못하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제대로 힘껏 울지도 울 때도 없던 영주는 결국 마음에 병을 얻은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주를 바라보는 기분이란 모래 늪에 빠진 사람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다는 기분이 들었고, 자칫 위로하고자 전한 말이 영주에게 상처가 될까 두려워 빨리 자리를 피했다. 




열심히 착하게 살아도 운이 닿지 않는 어떤 이들에게 삶은 꽤나 가혹하다. 

모래늪에서 빠져나온 다 할지라도 또 다른 모래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간다. 


처음부터 안 좋았던 이들은 여러 가지 면으로 자유롭게 살아간다. 바람을 즐기고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햇빛을 느낀다. 거친 곳에서 사는 이들은 바람에 몸을 숨기기 바쁘고 비에 맞아 추위에 떨며 햇빛에 타들어간다. 

노지에 뿌리를 박고 있어도 돌봄을 받는 유칼립투스는 온실 속 식물들과 다름이 없었고 

온실에 있어도 보살핌이 없이 썩어가는 뿌리를 부여잡고 출구 없는 곳을 헤매며 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테이블야자는 노지의 그들보다 훨씬 척박하다. 


부디 영주의 뿌리가 아직은 희망이 있기를 

바싹 마른 잎에 이슬이 맺히기를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도 

꿋꿋하게 빗방울을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남아있기를 

보살핌을 받는 주제에 잘난척하며 자라는 식물 병원에 얄궂은 그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뻗어나가길 

그리고 예전처럼 싱그럽게 웃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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