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마녀 리더십

멀리서 보면 두렵고, 가까이서 보면 안쓰러운

by 데보라

회사에서 중간 관리자 역할을 맡게 되면서 실무자들과도 계속 일했지만, 마찬가지로 임원과 리더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일할 수 있었다.


실무자 시절의 나에게는 ‘어른/윗사람’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윗사람’이라는 단어가 곧 능력과 품격을 뜻한다고 믿고 싶었다. 좋은 어른, 기댈 수 있는 리더를 기대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현실은 조금 달랐다.


직책과 지위는 그 사람의 깊이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이 가진 특정한 성향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많은 리더들은 존경할 만한 모습과 실망스러운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휴직을 결정하던 시기, 나는 회사로 돌아갈지 확신할 수 없었다. 조직의 큰 변화 이후였고, 앞으로 발전 가능성을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방식의 인사를 전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뒤집히는 순간을 여러 번 반복했다.

존경하던 상사는 변화 앞에서 침묵하며 뒤늦게 자책했고, 불편하게만 느껴지던 상사는 오히려 책임감 있게 자리를 정리하며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본인에게 상황이 불리해지자 즉시 자리를 떠나며 책임감을 모두 버리기도 했다. 결국 사람은 단일한 얼굴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한 리더를 만났다.

그가 걸어온 길과 성취만 본다면 누구도 가볍게 평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다양한 조직과 보직을 거치며 회사와 함께 성장했고, 중요 국면마다 전면에 섰다. 실행력, 디테일, 추진력을 모두 갖춘 강한 리더였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이 유형은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나는 이 리더십을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붉은 마녀’ 리더십에 비유하고 싶었다.

멀리서 보면 대단해서 두렵고, 가까이에서 보면 어딘가 안쓰러운 이유에서다.






1. 붉은 마녀가 만드는 두려움


붉은 마녀형 리더는 분위기보다 메시지를 우선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의 표정이나 반응을 살피면서 말의 온도를 조절한다. 하지만 이 유형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나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 '전달의 온도'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 '정당함'을 더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이 태도는 위기 상황에서 조직을 움직이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칼날이 사람들 관의 신뢰와 심리적 안전까지 같이 베어버린다는데 문제가 있다. 사람들의 인간적인 호의도, 감정도, 조직 내의 신뢰가 손상되면, 구성원들은 반론보다는 침묵을 선택하고 조용해질 뿐이다.


붉은 마녀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마녀 앞에서 말을 줄이고 숨긴다. 순응하고 복종함으로 인해 조직 내에는 갈등이 발생하지 않지만, 침묵은 또 다른 위험신호가 될 수 있다.






2. 붉은 마녀의 생존방식


붉은 마녀들은 조직정치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활용한다.


위로는 성과가 있더라도 상사의 공으로 무조건 돌린다. 윗 사람의 신뢰와 후원을 축적하며 성장한다.

상사들은 마녀가 '내 사람'이라는 감각을 가지게 되고 평가와 승진의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고, 그 신뢰는 점점 커져간다.


아래로는 앨리스에게 "나는 너희의 편"이라는 메시지를 주어, 관계 기반을 만들어간다. 때로는 혜택을 선별적으로 주면서 지지층을 강화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는 효과적인 생존전략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을 내 편으로 만듦으로써 본인의 입지를 만들고, 부정적인 뒷 이야기가 나오지 못하게끔 통제한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직이 진영과 감정으로 조직이 움직이기 쉬워진다는 데 있다. 권력이 집중되고, 그 권력에 가까이 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난다.


붉은 마녀들은 누구보다 더 많이, 세세하게 알고자 한다. 밤낮 없이 성실하게 일하는 것은 이들의 강점이다.

하지만 붉은 마녀가 '알고 있다'는 것은 곧바로 '통제해야 함'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조직은 붉은 마녀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정답을 얻어서 진행하는 문화에 익숙해지는 대신 자율성과 다양성을 점차 읽어간다.




3. 붉은 마녀의 슬픔


붉은 마녀가 아무리 능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송두리째로 흔들릴 때가 있다.

권력 구조가 바뀌고 조직 정치의 규칙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붉은 마녀도 조직 내 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이 유형은 변화 속에서 기존 기반을 유지하거나, 반대로 존재 기반을 아예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극단화되기 쉽다.


그리고 그 권력을 잃었을 때, 붉은마녀의 정체성은 사라진다. 통제와 성취로 보여주었던 본인의 존재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그리고 통제하지 못한 변화에 마녀는 분노한다. 성의 통치자라는 정체성을 잃었다면, 이제는 더 이상 통제할 대상을 잃은 마녀는 본인을 포함한 모든 것을 태운다.


그저 힘을 잃은 것에 대해 분노로,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본인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분노하며 본인을 포함한 모든것을 태운다.


멀리서 보면 그 분노는 정당해 보일 수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변화 앞에서 방향을 다시 세우지 못하는 괴로움일지도 모른다.




4. 앨리스의 선택


나는 붉은 마녀가 말해준 성공의 한 문장을 기억한다.

"아랫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쩌면 내가 상대적으로 하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저 관리자로써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바른 길로 가기를 바랬다.

가끔은 왜 그것밖에 못하는지 답답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것 처럼 본인이 생각하는 '정당함', '옳음'을 주장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정보를 독점하고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두려움과 복종을 요구하는 방식이 앞으로도 가능한 방법일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어떤 조직에게는 통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의 비용은 결국 청구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회사에서, 누군가의 성에서 일하며 살아가기로 결정한다면

대부분 처음에 앨리스로 게임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붉은 마녀의 가까이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면, 두가지를 동시에 보게 될 것이다. 멀리서 볼 때는 압도적인 추진력과 확신이 두려운 모습으로 보일 것이고, 가까이서 보이면 그 확신이 만들어낸 스스로의 긴장과 본인을 소진시키는 불길이 안쓰러울지 모른다.


붉은 마녀형 리더들은 누구보다 많이 알고, 세게 밀어붙이며 버텨온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 성실함과, 몰입, 성과 중심의 추진력은 분명 조직에 남는 유산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의 그림자를 기억해야 한다.

- 대화가 아닌 명령과 복종을 중심으로 움직이며 타율적 실행만 남는 조직의 모습

- 정보와 특혜가 줄 세우기의 도구가 되어, 리더 중심으로 의존하는 조직

- 성과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끝없이 소모되고 상처받는 흐름.



언젠가는 우리가 붉은 마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날이 올 지 모른다.

당신은 어떤 모습의 리더십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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