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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본 Feb 21. 2023

나의 “다이모니온”을 그리워하며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 X 에세이 <다정한 서술자>를 엮어서

무인도에 뚝 떨어졌을 때, 마침 가방 속에 있었으면 하는 그림책을 단 한 권만 꼽으라고 한다면 <잃어버린 영혼>을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책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붙일 만큼 이 책을 애정하는 이유는 글도, 그림도, 구조나 형식도, 디자인도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총체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바쁘게 사느라 영혼을 잃어버리고 만 '얀'이라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초반에 묘사되는 얀의 모습은 현대인의 초상이기도 하다. 앞쪽에 A4 한 장 정도 분량의 짧은 글로 그의 사연을 기술하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담백한 문장들이 모아져 있고, 그 뒤에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는 요안나 콘세이요가 오래된 종이에 연필과 색연필로 구현해 낸 서정적인 풍경들이 펼침면을 채운다. 접지선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영혼의 시점이, 오른쪽에는 얀의 시점이 이어진다. 자기만의 어떤 장소를 찾아 편안히 앉아서 영혼을 기다리라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얀은 영혼이 자신의 시간으로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글을 분절 없이 한 페이지에 몰아두고 글 없이 진행되는 페이지들을 연이어 쌓아 감으로써 독자들이 오롯이 얀의 기다림에 이입할 수 있는 고요를 선물한다.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만큼 얀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길게 자라나는 중이다. 영혼은 얀이 걸었던 시간의 자취를 따라 이곳저곳 이끌리는 대로 긴 방황을 거친다. 드디어 조우하게 되는 둘의 얼굴이 클로즈업 샷으로 양쪽 페이지에 동시에 잡힐 때, 깊은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마침내!



Zgubiona Dusza (The Lost Soul)(2017), Olga Tokarczuk, Joanna Concejo © Wydawnictwo Format



이 책에서 내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남성 주인공의 영혼이 어린 소녀로 표현되었다는 점인데, 한 사람의 내면에는 외면으로 드러나는 현상과는 또 다른 의외의 감성을 품고 있다는 은유로도 볼 수 있겠다. 영혼이라는 존재는 여린 소녀처럼 소중하게 대해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할까? 다시 처음부터 그림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표지가 나오기 전, 흰 눈이 쌓인 겨울 배경의 프롤로그에 어린 시절의 얀으로 보이는 한 소년이 소녀로 표현된 영혼과 하나의 줄로 이어진 손모아장갑을 한 짝씩 나눠 끼는 장면이 나온다. 손모아장갑은 ‘Pair(한 짝)’라는 단어에 꼭 맞는 시각적 표현이다. 그 둘은 둘이면서 하나다. 어쩌다 잠시 떨어질 수는 있어도 헤어질 수는 없는 한 쌍. 몸과 영혼은 그렇게 다시 만나 단짝이 된다. 영혼을 다시 만나고 나서부터 얀은 영혼이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속도가 어긋나지 않도록 급하거나 바쁜 일을 만들지 않고, 영혼과 발맞추어 ‘현존’하며 살겠다는 의지다. 


커버에 코팅 처리를 하지 않아서 손때가 탄 낡은 앨범을 손에 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가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만들어내는 손자국과 새로운 얼룩들이 커버에 스며든다. 빈티지한 분위기를 더해가도록 디자인에서 작가들의 의도를 잘 살린 덕분에 책 자체로도 내용과 발맞추어 아련한 향수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이 책이 선사하는 미학을 통해 한 번 더 그림책이라는 장르도 하나의 종합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통감했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예술이 아니라 어린이들부터 노인까지 계층을 나누지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예술로서 말이다.



Zgubiona Dusza (The Lost Soul)(2017), Olga Tokarczuk, Joanna Concejo © Wydawnictwo Format



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그림책처럼 나도 세상에 의미 있는 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늘 고민하게 된다. 선배 작가들의 훌륭한 책들을 공부하면서 이미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는데, 그림책에 필요한 그림도, 글도 기술적으로 내 욕심에 미치지 못해서 그 낙차에 실망하고 의기소침해지는 날들이 가끔 있다. 눈과 손의 속도가, 머리와 몸의 속도가, 영혼과 영감의 속도가 어긋나는 순간이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이다. 이미 많은 이야기가 존재하고, 많은 글과 그림이 존재한다. 책뿐만 아니라 홍수처럼 넘치는 정보와 콘텐츠로 이미 “다성적 메아리”들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에 또 하나의 목소리를 덧댈 필요가 있을까. 어떤 목소리가 그 가운데 존재 가치가 있을까. 이미 존재하는 훌륭한 것을 뛰어넘을 새로운 목소리는 어떻게 창조하는 걸까. 그림책 작가로서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을 때, 나의 잃어버린 영혼을 구제해 줄 처방처럼 올가 토카르추크의 에세이집 <다정한 서술자>가 내게 왔다.





<다정한 서술자>는 소설가로서 올가 토카르추크가 어떤 마음으로 문학을 하는지, 어떤 의미에서 문학(읽기와 쓰기)이 중요한 지를 이야기하는 에세이와 강연록을 엮은 책이다. 토카르추크는 복잡 다면적인 세상을 통합적으로 감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팩트에 기반한 사건에 자기만의 해석을 더해 기존 질서, 구분, 분류를 무효화해서 하나의 새로운 경험으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이다. 그 통찰을 바탕으로 동떨어진 조각과 파편들을 하나로 모아서 만들어낸 혼합물이 비유적/은유적 말하기를 가능하게 한다. 작가는 시간, 공간, 차원을 초월한 “메탁시의 영토”에 이미 퇴비처럼 유산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원소들을 재료로 결합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문학적 인물을 가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원소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쓰기’ 이전에 ‘읽기’가 선행해야 하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 헤르메스의 축복을 받은 ‘작가’라는 존재는 “메탁시의 영토”라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땅인 그 무의식의 정원을 가꾸어 나가는 정원사다. 


작가의 임무는 중심과 주류에서 벗어나서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질서들을 전복시키고, 작품을 통해 주어진 세상에 반항하고, 기존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올가 토카르추크는 말한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각을 의식적으로 탐색하는 “기벽”을 통해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것과 간과된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 시도는 기존의 규칙을 백지화한 “순수의 상태”에서 타자와 다른 세계를 온전히 경험하려는 “다정함”을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토카르추크의 표현에 따르면, 문학의 주인공과 배경이 될, 타자와 다른 세계들은 “메탁시의 영토”에서 자신의 무대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글로 쓰이기를 원하는 무엇인가’가 작가를 쓰게 만들고, 작가가 마침내 속삭임에 응답하여 그 주제에 착수하는 순간 우주의 에너지가 작가의 작업을 도울 것이라고, 그는 후배들을 격려한다. 그리고 그에게 다정한 서술자를 선물해 준 어머니와의 대화를 들려주며, 우리가 누군가를, 어떤 것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그것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는 개념을 알려준다.



“내 의식이 기억하는 첫 번째 사진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나의 어머니가 처녀 시절에 찍은 사진입니다. …(중략)… 대여섯 살 어린 나이의 나는 엄마의 처녀 적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확신했습니다. 사진 속 엄마는 지금 라디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며 나를 찾고 있구나. 예민하고 정교한 레이더처럼 우주의 광활한 영역을 관통해 내가 과연 언제 어느 곳에서 이 세상으로 올지 알아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중략)… 구부정한 자세로 프레임 밖을 향해 망연히 시선을 던지고 있는 사진 속 여인은 그 사진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눈에는 띄지 않는 뭔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였던 당시의 나는 어머니가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진 속에서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과정이 아닌 정지된 상태를 보여 주는 사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사진 속 주인공은 왠지 슬퍼 보였고, 마치 그 공간에 없는 사람처럼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나중에 내가 슬픔의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나는 같은 질문을 수없이 했고, 그때마다 항상 같은 대답을 들었습니다.) 엄마는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그리워하느라 슬픈 거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아직 세상에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날 그리워할 수 있어요?”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렸지만 그리움이란 누군가를 잃었을 때 솟아나는 감정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요. “때로는 순서가 바뀔 수도 있어. 우리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그 사람이 거기 존재하게 되는 거란다.” 엄마의 대답이었습니다.”
 - <다정한 서술자> 중에서, 올가 토카르추크, 민음사, p.332-334

 “어쨌든 모든 영혼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했고, 제비 뽑기의 순서대로 라케시스에게 갔다. 이 여신은 각자의 영혼에 신령(즉 다이모니온)을 붙여 주었는데 인생의 수호자로서 영혼이 선택한 운명의 실현을 돕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나서 신령은 영혼을 클로토에게로 인도하여 우주의 축을 돌리는 그녀의 손을 통해 각자 선택한 운명을 확인하도록 했다. 영혼이 클로토를 만지고 나자 신령은 운명의 실을 짜는 아트로포스에게 영혼을 인도했고, 여신은 영혼이 선택한 운명을 되돌리지 못하도록 실을 잘랐다. 거기에서 영혼은 뒤돌아보지 않고 필연, 즉 아난케의 왕좌로 걸어갔다.”
 - 플라톤의 <국가론>의 한 구절, <다정한 서술자>에서 재인용, p.183


올가 토카르추크의 예언적 문장들에 기대어, 그리워하는 것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 기다리다 보면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내가 앞으로 가치 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영혼이 작가로서의 운명을 택한 것이라면, 운명의 시험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뒤돌아보지 않고 필연으로 걸어가야지. “메탁시의 영토”에서 머물다가 목소리의 형태로 언젠가는 찾아올 나의 수호자이자, 주인공이 될, 나의 “다이모니온(문학적 인물)”들을 그리워하며, 나는 오늘 내 작업실 책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읽고, 보고, 듣고, 쓰고, 그리는 것으로. <잃어버린 영혼>은 기다림이 끝나는 이야기다. 지난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무인도 같은 내 작업실 문을 노크하고 그들이 들어올 것을 굳게 믿고 있다.



202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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