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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Nov 16. 2015

04. 러브 러브(Rub Love)

기억 캡슐이 필요해

나는 왜 이 영화가 떠올랐는가

망. 드.

망한 드라마를 줄여서 이렇게 부른 다지.

그렇다면 망한 영화를 줄이면 "망영"인가?


이 영화, 러브러브는 망한 영화다. 그것도 미안한 말이지만 쫄딱 말아먹은 영화다. 열 명 중에서 이 영화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의문이다. 심지어는 아무리 구글링 해봐도 이 영화 관련한 이미지 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갑자기 이 영화가 떠오른 건 얼마 전 김제동이 이끄는 힐링캠프에서 행복한 새 신랑 모습으로 변신한 안재욱 덕분이다. 타국 땅에서 갑자기 쓰러져 아팠다는 얘길 듣고서 빨리 장가나 가지 싶었는데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웬 오지랖인지;;) 그래도 첫눈에 반한 사람과 만나 아이까지 얻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미소를 짓고 있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안재욱을 한때 좋아했던 적이 있다. 그가 빵 뜬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강민 때 말고 (미안한데 난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더듬이 머리 하고 나와 괜히 멋진 척 하는 그의 모습에 손발이 오그라 들었다지) "짝"이란 아침 드라마에서의 건강하고 바른 이미지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김혜수와 함께 나왔던 "눈 먼 새의 노래"라는 드라마도 좋아했고. 초창기 때 안재욱의 모습을 좋아했던 지라 그 무렵에 개봉했던 이 영화도 보러 갔었다. 


낙원상가에 있던 허리우드 극장. 지금은 실버극장으로 바뀌었지만 그때는 예술 영화도 많이 상영했고 나름 영화를 좋아하던 할리우드 키드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허세 쩔어(?) 있던 나는 그 무렵 툭하면 충무로와 광화문 일대를 하릴없이 쏘다니곤 했는데 낙원상가와 파고다 공원도 내 아지트였다;; 낙원상가 뒤편에 있던 국밥집 골목길... 족발도 팔고 국밥도 팔고 생선도 굽고 쐬주도 팔고 우울한 인생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난장 피웠던 그곳. 지금도 그대로인지 모르겠다. 약간 으슥하기도 해서 쉽사리 어린 여자 혼자 들어가기엔 또 망설이기도 했던 곳...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혼자 영화를 보았다. 바로 이 영화다. 지금이야 뻘쭘할게 뭐 있나 혼자 팝콘에 콜라 사들고 커플들 사이에서도 당당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지만 그때는 아무리 내가 홀로 고독한 척 쏘다니길 좋아해도 간신히 패스트푸드점에서 끼니 정도 해결하지, 혼자 영화 보는 것은 암만 해도 남들 눈 신경 쓰이던 때였다. 


그래도 무슨 바람이었는지, 아마도 그 무렵이 우울함의 바닥을 찍었던 때지 싶다. 될 대로 되란 식이었고 겁도 없이 낙원상가에 성큼 들어서 국밥을 혼자 사 먹고(물론 냄새난다고 반 이상이나 남겼지만) 층계를 걸어올라가 이 영화의 표를 끊었다. 안재욱이라는 이름만 믿고 보게 된 영화. 극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나는 무서움 반 기대 반으로 가방을 끌어 안은채 영화를 보았다. 


기억 캡슐이 필요해

아아. 

내 우울함의 바닥이 더욱 깊어졌던 영화.... 스토리는 고사하고 영화가 무슨 종류의 영화인지도 모를 영화였다;; 줄거리를 어쨌든 짜내 보자면(내 기억엔 거의 남아있는 게 없어 어쩔 수 없이 네이버를 검색해봤다) 내가 기억 나는 거라곤 기억을 없애주는 알약밖에 없다. 그 알약을 먹고 나도 지우고 싶은 기억을 없애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부살인업자 나나가 목표물 제거를 위해 찾아든 한 모텔에서 만화가 조한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조한은 나나에게 첫눈에 반하고 나나가 타깃을 제거하기 위한 중요한 순간에 한이 나타나 사랑을 고백하면서 모든 일은 꼬이게 된다. 한이 기억을 없애는 기억 캡슐을 훔치면서 나나를 곁에 두기 위해 그 캡슐을 먹이게 되고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나나에게 한은 자신과 나나가 얼마나 사랑하는 사이인지를 마치 한편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처럼 들려준다. 


기억 캡슐과 나름 그로테스크했던 화면들의 구성과 색감 정도가 기억날 뿐. 영화의 스토리도 배우들의 연기도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영화였다. 나나 역엔 그 당시 개성 있는 마스크로 인기 있던 이지은 씨가 했다. 지금은 연예계를 떠나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 영화에서의 모습도 참 인상적이었다. 안재욱의 연기 변신을 위한 고민이 보였던 영화였지만 역시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게 있고 그걸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영화를 보고서 더욱 우울해진 감정으로 버스를 타고 집에 오던 것이 기억난다. 기억 캡슐은 내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말 기억 캡슐이라도 털어 넣은 듯 이 영화를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지만 문득 안재욱을 화면에서 볼 때면 나는 늘 이 영화가 떠오른다. 아마 안재욱조차도 잊고 싶을 흑역사일지도 모를 이 영화. 


하지만 누구나 그런 흑역사가 모이고 모여 역사가 이뤄지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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