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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Nov 26. 2015

05. 연인

성(性)에 대한 상상력

방.. 방.. 방...
예전에는 그렇게 방시리즈가 많았다.


노래방, 만화방, 비디오방, 방방... 처음으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온가족이 모여 보던 때를 잊지 못한다. 한창 홍콩영화가 붐을 이루던 시절에는 친구들과 함께 모여 천장지구니 영웅본색이니 신조협려니 동방불패니 하던 영화들을 섭렵했었다. 동네 비디오 가게를 뻔질나게 들락거렸는데 유난히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동생하고 네가 가서 빌려라, 등 떠밀고  실랑이하던 때가 딱 두 번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였으니 그 나이대 성에 대한 호기심과 민감함은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았다. 지금이야 접할 기회(?)도 많고 너무나 손쉽게  자극받는 시대라지만 그때는 그럴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아서 오히려 더 기억에 많이 남아 있다. 삼촌이 읽던 성인 잡지를 몰래 훔쳐와 보던 기억이라던지 비디오 가게 성인코너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기억이라던지. 그런 무렵에 파리넬리와 연인이 개봉했었다. 사실 파리넬리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는데도 청소년 관람불가로 개봉 한터라 극장에는 가지 못하고 나중에 비디오 가게에서 서성거리다가 간신히 빌려와 보면서 어찌나 설레었던지. 그 전에 연인이라는 영화가 92년도에 개봉했었는데 이 영화는 아예 포맷 자체가 성인물이어서 비디오 가게에서 정말 동생과 30분을 서서 대치했었다.


나는 양가휘가 나온 야한 영화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 영화를 봐야 할 수백 가지 이유가 충족되었는데 문제는 학생 신분이었던 내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대범하게 비디오 가게에서 그 영화를 빌려오기엔 그때의 나는 너무 소심했다는 거다. 해서 나보다는 활발했던 동생을 꼬드겼는데 한 살 터울 여동생의 성교육을 내가 시켰을 만큼 나는 참 그런 쪽으로는 일찍 성숙(?) 했던 것 같다. 동생에게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를 대면서 함께 비디오 가게로 향하긴 했는데 문제는 동생 역시 이 영화를 빌려올 만큼 배짱은 없었다는 거다. 30분을  실랑이하다가 결국 우리는 둘 다 들어가기로 합의했고 들어가서도 정말 다른 영화를 빌려온 사람들처럼 여기저기한참을 기웃거렸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다른 가족 무비와 함께 이 영화를 조심스레 껴서 빌렸는데...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비디오 가게 아저씨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ㅎㅎ


그렇게 해서 본 영화가, 연인이었다.



누가 나한테 언제 성에 대해 눈을 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정확히 말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영화였다. 그 후로 야동도 보고 이 영화보다 훨씬 야한 영화도 많이 봤지만 나는 이 영화가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야한 영화였다. (다른 하나가 더 있는데 "나인하프위크"다ㅎㅎ)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가난한 소녀가 부유한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 서로를 탐닉하고 사랑에 눈을 뜨는 것. 엔딩이 어땠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건 소녀 역의 제인 마치가 하늘거리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양갈래로 땋은 머리 위에 보터햇을 쓰던 모습과 양복을 쫙 빼입고 머릴 단정하게 빗어 넘긴 양가휘와 차에 함께 타 서로의 손가락 끝이 닿던 전기가 찌르르 흐르던 섹슈얼한 모습이다. 이 장면은 이 후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사용되었다. 서로 호감을 갖고 있던 남녀가 서로의 손끝이 닿고 전기가 흐르고 서로를 바라보고....  물론 양가휘의 까맣게 잘 그을린 엉덩이도 충격적인 비주얼이긴 했지만 이상하게 나는 서로의 손가락을 타고 흐르던 숨막힘이 인상 깊게 남아있다.


진정한 섹시는 옷을 훌러덩 까고 나오는 게 아니라 보일 듯 말듯한 상상력이라 생각한다.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는 상상력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많이 접할 기회가 없고 스마트 폰, 인터넷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이 더 상상력이 있던 시대였다. 우리 모두가 응답하라 시리즈에 열광하는 것은 상상력이 풍부하던 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는 나한테 있어 성(性)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해주던 영화였다.


뭐 관계적으로 봤을 때 건강한 남녀 간의 관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삼촌이 보던 성인잡지보다는 상상력이 풍부했다는 뜻이다. 소녀와 남자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지만 원래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 더 드라마틱하고 애틋한 법이다. 요즘 옛날 영화들이 재개봉되고 있는데 이 영화도 최근에 재개봉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가슴 두근거리며 봤던 영화들을 나이가 든 지금, 다시 본다면 어떤 기분이 될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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