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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Feb 03. 2018

납작한 나의 하루하루.

하트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김중혁 작가는 신간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서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북카페에 들려 맛있는 토마토 바질 스콘과 라떼를 허겁지겁 먹고 마시며 본 책이라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일기를 쓰지 않는 이유가 일기를 쓰면 하루가 짧게 느껴진다고 했던가? 아니면 길게 느껴진다고 했던가? 아무 일도 없는 하루를 꾹꾹 눌러쓰고 나면 그 하루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고 했던가? 


나는 새해 들어 꼬박꼬박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라고 해봐야 위클리 다이어리를 사서 그 작은 네모칸 안에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단순하게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김중혁 작가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하루가 흩어져 사라져 버리기 전에 아무 의미도 없이 기억 속에서 밀물처럼 휩쓸려 가기 전에 하루를 꾹꾹 눌러쓰고 납작하게 압축시켜 놓는다. 그러면 내 하루도 어쩌면 의미 있게 그리고 매우 짧고 알차게 느껴진다. 


그런 하루하루에 몇 편의 영화를 보고 몇 권의 책을 샀고 몇 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대여했고 몇 군데의 책방을 들렸다. 날씨는 여전히 춥고 고칼로리의 압박은 서서히 옅어져서 허리띠를 풀러 놓고 먹게 된다. 오늘은 함박 스테이크, 내일은 치즈가 잔뜩 늘어나는 피자 이런 식이다. 홀터 검사를 다시 한번 더 하게 되었고 약을 바꾸고 나서 불면증에 시달려서 다시 그 전 약으로 돌아갔다. 점점 자주 찾아가게 되는 병원은 점점 익숙해진다. 


종종 잠이 안와 이런저런 생각에 뒤척일 때는 있었지만 이번에 찾아온 불면증은 불안증과 함께 와서 너무 힘들었다. 자고 싶은데 잠들 수 없는 고통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 눕기만 하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잠이 드는 동생은 역시 내가 잠들지 못하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의 나날은 하얗다. 하얗게 지새우는 밤에는 일어나서 괜히 밖을 내다보는데 다들 잠든 새벽에 나 혼자라는 생각에 무서워졌다. 


전 직장 동료 A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밥을 샀는데 돈도 없으면서 지난번에도 사고 이번에도 또 사냐고 만류했다. 아, 지난번에도 내가 샀구나. 진작 좀 말하지. 밥을 샀는지 안샀는지 기억도 못하는 내가 멍청한 건지. 돈도 없는데라고 대놓고 말한 A가 얄미운 건지. 암튼 밥은 내가 샀다. 누가 사면 어떤들 싶지만 돈도 없는데, 라는 말을 들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아, 내가 A한테 그동안 돈 못 번다고 엄청 징징 거렸구나. 그러면 먼저 좀 내지. 내는데 그런 말 하는 건 뭔가 싶고. 이런 생각하는 것도 내가 돈이 없어서 그렇지 싶고. 갑자기 밥값으로 낸 돈이 아까워지고. 이래서 자격지심이라는 게 생기는 거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지 하면서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 항상 상대방의 불행이 더 큰지 내 불행이 더 큰지 재고 있다. 행복을 재고 있는 것도 싫지만 불행을 재고 있는 것도 싫다. 난 언제부터 이렇게 계산적인 사람이 되었는가. 사람은 너무 행복해하는 사람도 너무 불행해하는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은 거다. 


그날 저녁엔 나도 예전에 찍어 뒀던 치즈가 잘 늘어나는 피자 사진을 SNS에 올리고 혼자 만족해했다. 다른 사람들의 잘 포장된 행복에 하트를 끊임없이 눌러대는 행위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 BGM : 우효 "꿀차"

하루는, 차를 마시려고 했어

물을 끓이려고 주전자를 켰어

그러다, 잠깐 네 생각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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