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있는 통로, 그 너머에 있을 '무언가'를 놓치지 않기를
보러 갈 결심을 한 건 순전히 이 포스터 때문이었다. 마트 통로 앞에 놓인 지게차 한 대. 그리고 위를 쳐다보는 두 남녀. (영화를 다 보게 되면 포스터에 나온 이 장면이 영화 속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통로, 저 너머로 보이는 푸르고 아름다운 바다의 풍경이 단 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포스터를 보고 나니 에드워드 호퍼의 'room by the sea'가 떠올랐다. 그늘진 방 한편에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열린 문 사이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빛. 그리고 그 너머에 넘실거리는 짙푸른 물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호퍼의 그림 중 하나다.
호퍼는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쓸쓸함의 순간을 마치 사진처럼 잡아채 그렸던 화가였다. 그래서 '외로운 마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부제가 있는 이 영화야 말로 호퍼의 그림을 내내 생각나게 했다.
시네마톡으로 보았고 좋은 영화라 많이들 봤으면 좋겠어서 쓴다. 스포일러가 중요한 반전은 없지만 쓰다 보니 스포라 생각할 만한 내용들이 있다. 읽어보고 가서 보더라도 괜찮지만 조금이라도 알고 싶지 않다면 다 보고 나서 읽어주시길.
영화의 배경은 창고형 대형 마트이다. 우리가 늘 쉽게 볼 수 있는 바로 그곳이다. 크리스티안은 이제 막 주류 코너 야간 조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목과 어깨 팔에 이르기까지 문신이 있다. 매일 아침 문신을 가리며 유니폼을 입고 '고객에게 비친 내 모습'이라 쓰인 거울을 보고 출근을 한다. 신참이라 아직 모든 것에 서툰 크리스티안은 동료들과 선배 브루노의 도움으로 차츰 적응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캔디 코너에서 일하는 마리온을 알게 된다. 짧은 꽁지머리를 묶고 지게차를 모는 마리온에게 크리스티안은 첫눈에 반한다.
영화는 '크리스티안', '마리온', '브루노'의 세 명의 이름을 딴 세 챕터로 나뉘어 진행된다. 세 사람의 이야기는 많은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 친절하게 다 보여주거나 설명해주지 않는다. 크리스티안의 가족에 대해서 혹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마리온의 쓰레기 같다는 남편에 대해, 브루노의 아내나 그가 결국은 자살할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부분 알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여백이 이 영화가 주는 미덕이다. (시네마톡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이동진 작가님은 그걸 미니멀리즘으로 표현했고 운율처럼 반복되는 장면들에서 시적인 리듬이 발생한다고도 말했다.) 영화의 여백은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크리스티안이 출근하며 반복되는 장면들이나 마리온을 보면서 파도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장면들은 그 자체로 시처럼 리드미컬하다. 일상이 주는 리듬과 여백은 그래서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턴슨'과도 비교가 된다.
시네마톡에서 지게차가 나오는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영화가 아니겠느냐는 우스개 소리도 했지만 정말 그랬다. 첫 장면부터 클래식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흘러나오며 어둔 마트 매장 안에서 마치 스케이트장에서 미끄러지듯 매끄럽게 움직이는 지게차들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마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구동독 사람들이다. 통일이 되기 전 마트가 있던 자리에는 트럭 회사가 있었고 직원들은 트럭을 몰던 사람들이다. 브루노도 마찬가지고 회사에서 그대로 일자리를 승계받아 트럭에서 지게차를 몰게 된 것이다. 브루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크리스티안을 자기 집으로 불러 술을 마신다. 처음으로 털어놓는 그의 속마음은 트럭을 몰던 때가 그립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은 동독에는 흐르지 않는다. 통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서독에 비해 사는 것이 퍽퍽한 그들의 삶은 마트에서 나온 유통기한 지난 음식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어치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쓸쓸하면서 따뜻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그 속에서 기어코 잡아채 사진처럼 마음에 콕 박히던 몇 장면들에서였다.
마리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유통기한 지난 초코바를 훔쳐와 눈을 감게 하고 초 하나를 꽂아 마리온의 손바닥 위에 놓고 축하하던 장면, 브루노와 크리스티안 두 사람이 나눠 피던 담배 연기들, 환하게 웃으며 크리스티안이 몰던 지게차 위에 올라타고선 지게차가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던 마리온의 모습까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무엇보다 따뜻한 장면들이었다.
마리온으로 분한 산드라 휠러는 이미 '토니 에드만'이라는 영화로 국내에는 익숙한 얼굴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토니 에드만을 보지 못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보려고 시도를 했으나 초반 몇십 분을 버텨내지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산드라 휠러보단 크리스티안 역을 맡은 프란츠 로고스키가 눈에 띄었다. 처음 나올 때부터 강렬했다. 문신을 한 탄탄한 몸에 내가 본 외국 배우 중 가장 심한 다크서클을 한 깊은 눈매에 웅얼거리는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묘하게 호아킨 피닉스 젊은 시절을 닮았다. 궁금해져서 찾아봤더니 안타깝게도 국내에 알려진 작품들은 거의 없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한정된 사람들로 이렇게나 아름다운 영화를 만든 건 훌륭한 연출력 덕분이겠지. 젊은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나오는 음악들이 하나같이 좋았는데 그중에서 오프닝 곡으로 쓰인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다. 마트 매니저가 손님이 다 돌아간 뒤 밤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트는 클래식 음악들이 좋았다.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서있는 통로가 어디일지라도 그 너머에 있을 '무언가'를 놓치지 않기를. 크리스티안과 마리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