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영혼으로 일하지 말자
아빠는 여러 회사를 전전했다. 대학도 다니다가 그만뒀고 사무실에 앉아 근무하던 회사도 그만두고 그 뒤로는 운전을 했다. 운전도 한 군데서 한 게 아니다. 내 기억에는 회사도 수시로 바꾸고 집에서 쉬기도 수시로 쉬었다. 아빠는 진득하게 참고 버티는 성미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빠는 '을의 마인드'가 없었다. 누구 밑에서 일하는 걸 곤욕스러워했고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손 내미는 것도 못했다. 그렇다고 귀에 달콤한 말로 포장하는 능력도 없었다. 회사와 회사 사이를 전전하다가 쌀마저 떨어지고 나서야 어느 날 갑자기 딸기 장사를 시작했다. 어디서 리어카를 끌고 와서 딸기를 떼어와 리어카 가득 싣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하지만 아빠는 딸기를 하나도 팔지 못했다. 저녁이 다되어 딸기가 무를 때까지 입도 뻥끗하지 못한 채 서있기 일쑤였다. 저녁 시간이면 엄마는 우리를 끌고 나가 떨이로 딸기를 팔았다. 딸기가 수북하게 담긴 리어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생각난다. 남는 건 집에 와서 우리가 먹었다. 그렇게 먹었는데 딸기가 질리지도 않고 여전히 맛있는 건 미스터리다. 아마 딸기 장사가 짧게 끝났기 때문일 거다. 아빠는 장사도 금방 때려치웠다.
그런 아빠를,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똑같이 닮았다. 진득하게 참고 버티는 성미가 없고 금세 질려하고 돈 하나 없이 여러 군데 전전하는 인생... 그런 나한테도 '을의 마인드'가 없다. 누군가에게 굽히고 들어가거나 아쉬운 소리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지 못한다. 회사에서 일할 때야 커리어를 잘 쌓진 못해도 그런 성격이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프리랜서 일은 다르다. 처음 거창하게 마음먹었던 것과는 다르게 전 회사 일을 따오는 수준에 머물렀다. 어디가서 일달라고 나를 포장하는 일에도 서툴렀다. 중간중간 들어오는 일이나 견적 달라는 메일에도 나는 '을의 마인드'로 일하지 않았다. 하면 하는 거고, 안 하면 안 하는 거고. 전 회사 일은 더 쉬웠다. 이미 아는 일이고 아는 사람들이었다.
문제가 생긴 건 전 회사 직원들 물갈이가 되면서 같이 일해 본 적 없는 젊은 A대리와 일하게 되면서였다. A대리는 스타일이 전혀 나와 맞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일을 못했다. 메일 쓰는 건 구구절절했고 수시로 메일 토스를 해오거나 개인 톡과 단체톡으로 테러하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는 실무 정보들은 주지 않아서 때마다 내가 얘기해야 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파일을 원했건만 사원이었던 B와 비교해봐도 일을 못했다. B는 불필요한 말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해서 한 파일로 넘겨주니 메일이나 톡이 수시로 오갈 일도 없었다. 일을 잘한다는 건 불필요한 연락이 없어야 한다. 나는 일하면서 친해진다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아니 대체 왜?
최종 수정안이라고 해서 보내온 파일도 자기 멋대로 짜깁기해서 내가 못 알아보게 했다. 이미 수정된 파일에 표기를 해서 주니 잘 못 받아들일 수밖에. 결국 내가 톡으로 했던 말 중 어떤 말이 A대리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통화를 하니 감정이 격해져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통화하기 전 절대 소리 지르거나 흥분하지 말자고 했던 내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오해를 풀었다기 보다는 서로 할말만 다하고 난 후 통화를 끊기 전 담담하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나한테 일 안 줘도 좋다."
이건 뭐, 일을 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일을 주지 말라고 선전 포고한 거지. 끊고 나서 소리부터 지른 게 짜증이 났다. 원래 씩씩대고 화내는 사람이 지는 거다. 동생이 내내 하던 말이다. 제길. 절대 일로 통화할 때 흥분하거나 소리 지르지 말라. 상냥하게 웃으면서 살살 긁어라. 이게 동생의 비즈니스 모토다. 웃으면서 먹이는 것. 내가 제일 못하는 거다. 난 어려서부터 화가 난 상태로 말할라치면 숨이 가빠지고 눈물이 고여서 더 화가 나고 목소리는 떨리고 그래서 냅다 소리부터 지른다.
통화를 끊고 나니 감정 소모가 심해 차라리 출퇴근 길에 시달리는 게 나을 것도 같다. 톡으로 일할 때는 용건만 간단히. 감정을 실어서 쓰지 말자. 제발 영혼을 갈아 넣어서 일하지 말자. 영혼을 집에 놓고 철저하게 일하는 모드로 바꾸는 것. 그게 바로 을의 마인드다. 하지만 난 A와는 일하지 않을 생각이다. 회사와는 달리 프리랜서의 장점은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손가락을 쪽쪽 빨고 앉아 있을지언정. 나는 을의 마인드가 없다. 배곯기 딱 좋은 성격이다. 우리 아빠처럼. 하지만 이게 나인걸. 어쩌나.
♬BGM : linkin park "in the end"
I tried so hard
And got so far
But in the end
It doesn't even matter
I had to fall
To lose it all
But in the end
It doesn't even matter
가사가...지금 내 마음이랑 찰떡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