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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Mar 22. 2019

브로콜리 수프

따뜻한 기운을 빌리려...

환절기 감기가 시작되었다. 여지없이. 

아픈 몸을 끌고 나가 브로콜리 한 송이와 파스퇴르 버터를 사 왔다. 어제 갑자기 브로콜리 수프를 따뜻하게 먹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버터는 유통 기한이 오래 지났고 브로콜리는 없다. 버터 값이 이렇게 비싼 지 몰랐다. 예전에도 썼지만 난 요리와 거리가 멀고 따라서 재료 가격에도 무디다. 무슨 자신감으로 사 온 건지 모르겠지만 블로그가 일러 준대로 따랐다. 


브로콜리는 물을 튕겨내기 때문에 잘 세척하기 위해선 거꾸로 찬물에 담가준다. 몇 번을 씻어내고 송이를 칼로 톡톡 쳐낸다. 물론 줄기도 먹을 거다. 소금을 넣은 팔팔 끓는 물에 잠깐 데쳐낸다. 양파 한 개와 감자 한 개를 씻어서 채 썬다. 감자는 이미 싹이 나왔고 양파는 한쪽이 물렀다. 이런 재료를 먹어도 될까 싶은데 버리긴 아까우니 그냥 먹는다. 싹을 잘라내고 파내고 양파는 무른 부분을 잘라낸다. 채 썰기라고 해도 그냥 맘 내키는 대로 썰어도 된다. 어차피 다 갈 거니까.


비싼 버터를 칼로 두 조각 썰어서 프라이팬에 살살 녹인다. 너무 금세 녹아서 깜짝 놀랐다. 알 수 없는 노란 물이 흘러나온다. 지글지글. 파스퇴르 버터는 노란색이다. 잘라놓은 감자와 양파를 함께 넣고 달달 볶는다. 양파는 오래 볶을수록 단 맛이 나서 좋단다. 카라멜라이징이란다. 나는 성격이 급해서 못 기다린다. 우유를 600ml 쭉 붓는다. 맙소사 노란 버터가 우유에 둥둥 떠오른다. 데친 브로콜리까지 그 위에 놓고 보니..... 이거 먹는 거 맞나 싶다. 비주얼이 흉하다. 중불로 브로콜리가 익을 때까지 끓인다. 그리고 핸드 믹서기로 갈아주라는데.... 우리 집에 있는 게 핸드 믹서기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알고 보니 핸드 믹서기가 맞는데 난 굳이 식혀서 건더기를 다 건져서 하나씩 갈아주고 다시 프라이팬에 쏟았다. 갈아놓고 나니 내가 알고 있는 브로콜리 수프 색상이다. 


피자 먹고 남은 파마산 치즈를 뿌리고 소금으로 간을 해서 한 번 더 끓여낸다. 후추도 살짝 뿌려준다. 맛은 생각보다 괜찮다. 간이 싱겁고 되직한 것 빼고 괜찮다. 우유를 조금 더 넣고 간을 더 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냥 먹기로 한다. 처음엔 파는 브로콜리 수프와 달라서 실망스러웠다. 사 먹는 감칠맛은 건강엔 좋지 않지만 입에는 좋다. 하지만 먹다 보니 맛있어서 두 그릇을 비웠다. 


홋카이도에서 먹은 수프 카레 생각도 난다. 눈 오는 날 사 먹으러 갔다가 뼛속까지 따뜻해진 맛. 수프는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프면 생각나는 것 같다. 따뜻한 거 먹고 온 몸 구석구석 그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고 나면 힘든 일들도 사라진다. 


하루하루가 무기력하다. 방통대 공부를 시작했다. 십여 년 전에 방통대 공부를 해봤다가 제적당했다. 무슨 생각으로 다시 시작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뭐든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그러기엔 공부하기가 너무 어렵다. 굳어진 머리에 듣도 보도 못한 전공 용어들로 강의를 하는 교수들 영상 보면서 나 혼자 욕한다. 게다가 옛날에는 없었던 중간 과제물도 서술형 보고서로 A4 몇 장씩 써내야 한다. 이런 글쓰기 안 해본 사람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요즘엔 취업을 하려고 용쓰고 있다. 딱 2년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나니 두 손 두 발 들었다. 취업을 하기엔 내 나이도 벼랑 끝에 서있다. 다시 취업을 생각할 줄 몰랐는데 막상 이력서를 내기 시작하니 더 절망스럽다. 어디 가서 든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내 경력은 회사에선 부담스러운 연차다. 경기는 풀릴 생각을 안 하고 취업난은 심각하다. 이번에 이력서 내면서 놀란 건 이 바닥 연봉이 어떻게 된 게 퇴행 수준이라는 거다. 물가는 끝없이 상승하고 있는데 쥐꼬리 만한 연봉이 퇴행하면 어떻게 살란 거지? 그런데도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탈락. 내 연차와 내 연봉이 높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자꾸만 움츠러든다. 그중에서 몇 군데 면접을 보기도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한 곳은 광역버스 타야 하는 곳이어서 출퇴근길에 서서 시달려야 할 게 끔찍했고 한 곳은 가깝지만 내가 만나 본 면접관 중에서 가장 똘아이였다.


이력서 낸 곳 중에서 처음으로 탈락 메일을 받았다.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함께 하지 못하게 되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비록 이번에는 함께 하지 못하지만 이후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길 바란다'


회사는 떨어졌어도 내 자존감은 떨어뜨리지 않아 준 고마운 메일이다. 


브로콜리 수프를 먹고 온 몸 구석구석 따뜻한 기운을 보낸다. 힘내야지. 



♬BGM : 브로콜리 너마저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브로콜리 이야기니까 단순하게 떠올랐다. 옛날엔 브로콜리 너마저 많이 들었는데... 제목과는 달리 사랑한다는 말은 항상 힘이 나고 위로가 되는 얘기지... 그런 말 들어 본지...그만두자. 눈물난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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