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괜찮아
아버지는 건강해 보였다. 묻지도 않는 옛날 일들을 끄집어냈다.
"내가 말이야. 한 때는 떡국이 맛있어 가지고 떡국만 일주일을 먹었거든. 근데 그때 된통 체해가지고, 말도 마라. 죽는 줄 알았어. 근데 니 엄마가 손을 잘 따잖아. 그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해서 손 좀 따주면 안 되겠냐고 했지."
"... 그게 무슨 말이야? 이혼했는데 체했다고 손 따달라고 오라고 했다고?"
"그러니까.. 얼마나 급했으면.. 아주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엄마가 뭐래?"
"병원 가라고 그러지."
어이가 없으니 웃음이 났다. 하하하. 시트콤 같은 얘기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꼬막 비빔밥을 먹고 디카페인 커피를 마셨다. 다행이다. 별 이상도, 다른 증상도 없다고 했다. 그래도 이제 평생을 약물로 관리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나 나나 평생 먹어야 할 약은 익숙하다. 가짓수가 늘어날 뿐. 백세 시대란 결국 약으로 수명을 연장하며 끝없이 병원을 들락거려야 가능할 나이인 것이다.
아버지의 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답답해졌다. 아버지는 당신밖에 몰랐고 융통성 없이 고지식했으며 귀가 얇고 대책이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건강을 챙긴다며 술과 담배를 끊은 것 까지는 좋았지만 당신 잣대로 판단하고 고집을 부렸다. 이제는 혈관에 꽂혀서 양파와 토마토가 좋다며 수시로 먹어댔고 기름진 것을 피하라는 말을 고기 먹으면 안 되는 줄 알고 모든 고기를 거부했다. 불과 얼마 전 까지는 편의점 도시락이나 믹스 커피를 마시던 분이 갑자기 또 그러니 적응이 안됐다. 우유가 좋다며 추운 겨울날 그것도 심혈관이 안 좋은 냥반이 밖에서 차가운 우유를 한꺼번에 마시고 심장이 종일 얼얼했다며 이젠 우유를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아이 같다. 처음으로 내가 아버지를 닮았구나. 인정했다. 많은 부분에서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와 엄마는 몇 년 전 이혼했다. 남들이 흔히 말하는 '황혼 이혼'이었다. 황혼이 주는 어감은 마치 씨를 뿌려 노랗게 열매 맺은 황금 들판처럼 여유로운 노년의 삶이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두 분은 절벽 끝에서야 서로 갈라질 결심을 했다. 갈라지고 나서 두 분의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노년이 시작되는 두 분의 삶은 황금 들판이 아니라 쭉정이 가득한 허허벌판이었고 그 들판 사이에 나와 동생이 서있었다. 동생은 어느 한 편을 선택해 그 길로 간 뒤로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 무뎌지고 애틋해졌다. 나이가 든 자식들은 둥지를 떠나 왜 독립해야 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경제적 독립뿐만이 아니라 정서적 거리감을 유지한 채 바라보는 부모의 모습은 남다르다. 이해하진 못해도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정서적 거리감은 물리적 거리에서 나온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아버지와는 숱한 눈물과 원망의 계곡을 지나서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같이 밥을 먹고 서로의 안부를 묻게 되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연락이 온 건 작년 성탄절 무렵이었다. 성탄 트리도 장식하지 않은 채 나는 잘 낫지도 않는 족저근막염을 비롯해 몸 여기저기 달고 있는 내 질환들에 지쳐가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해서 담담하게 말했다. 심장 쪽이 뻐근해 동네 내과에 갔다가 다시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미 전에도 나한테 연락도 없이 이비인후과 수술을 비롯해 녹내장 수술까지 혼자 받았던 사람이었다. 왜 연락도 없이 했냐고 잔소리를 했지만 내심 혼자 살면서 건강은 알아서 챙기는 편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 아버지가 이번에는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병원에서 혼자 오면 안 된다고 했단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별일 아닐 거라고 애써 불안한 생각들을 지우며 연말 스케줄을 소화했다. 친구도 만나고 영화도 보러 다니고 뮤지컬도 보러 다니고... 머리로는 냉정하게 별일 아니라고 단정 지었지만 가슴은 요동쳤다. 집과 밖으로 오고 가는 버스 안에서 소화가 안되고 윗 가슴이 찌르르하니 전기라도 통하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약을 먹고 있는 데도 부정맥이 다시 재발한 것처럼 날뛰었다. 스트레스였다. 당장 아버지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다. 할 수 없이 동생에게 털어놨고 동생은 냉정하게 검사비를 걱정했다. 동생은 아버지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만을 지려고 했다. 차라리 동생처럼 현실적인 생각을 하니 차분해졌다.
아버지의 혈관조영술은 새해 둘째 날로 잡혔다. 처음으로 환자복을 입은 아버지를 모시고 여기저기 다녀야 했다. 이제 이런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음을 다잡았지만 링거대를 움직이는 내 몸짓은 어설펐고 괜스레 아버지한테 짜증을 내기도 했다. 혈관조영술 하는 곳은 심혈관 중환자실과 같이 있어 대기실에 있는 몇 시간 동안 중환자실 보호자와 의사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게다가 반대편에는 신생아 집중 치료실도 함께였다. 태어나서 고통스러운 생명들이 빽빽 울어대고 다른 한쪽에서는 늙고 소모된 육신에 심정지가 오고 혈관이 막혀 누워 있다. 뫼비우스 띠처럼 무한 반복되는 삶의 고리에 새삼 진저리가 났다. 나는 그 고리의 어디쯤 있을까.
다행히도 아버지는 스텐트 삽입 수술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이미 심장 동맥 모두 어느 정도 막혀 있지만 고령 환자가 이 정도에 삽입 수술하는 것도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약물 치료를 받는 것으로 끝났다. 치료라기보다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하는 완화 치료였다.
아버지는 괜찮았지만 나는 그 뒤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았다. 내 심장소리가 다시 귓가에 고스란히 들리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이면 다시 시작되는 하루에 감사하고 매일 밤이면 불안증에 시달렸다. 태어난 것이 고통 같았다. 사두고 오랫동안 읽지 못하던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를 읽기 시작했다. 희한하게 그 뒤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지는 이국종 교수의 글에서 피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 피 냄새에 위로를 받았다. 사람은 원래 그런 것이다.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증오' 속 대사가 내내 떠올랐다.
여기까지는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우리는 추락하는 게 아니라 착륙하는 거야.
♬ BGM : Jessye Norman "Erlkonig"
*스카이 캐슬 덕분에 찾아 듣게 된 슈베르트의 '마왕' 제시 노먼 표정 연기 좀 보세요. 스카이 캐슬은 대본과 연출, 연기 모두 미쳤지만 음악도 참 좋다. 오늘 한다. 유일한 나의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