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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Jun 10. 2019

소음

위층 인테리어 공사 공문이 엘리베이터 안에 붙여 있었다. 무시무시한 선전포고 같다. '이제 앞으로 열흘 동안 굉장히 시끄러운 소음이 발생할 수도 있다! 분명히 말했다!' 뭐 이런 느낌이다. 열흘 동안 계속되는데 바로 오늘부터였다. 바로 위층이라 소음이 장난 아닐 듯하여 일찌감치 나갈 준비를 했다. 9시부터 쿵쿵거리고 뭔가 들어내고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는데 생각보다 소음이 약하다. 씻고 선크림을 바르고 가방에 노트북까지 넣고 잠깐 생각했다.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문밖을 나가는 데 오래 걸린다. 동네 스타벅스에 눈곱도 안 떼고 20분 걸어가 아이스 라떼는 사서 올 지언정 외출하려고 맘먹고 나가는 데는 그 마음을 먹기까지 오래 걸린다. 예전에는 나가기 싫어서 약속도 미루거나 깬 적도 많다. 물론 상대방한테는 나가기 싫다고 말할 수 없으니 거짓말을 했다. 사실 나는 거짓말하는 데 익숙한 편이다. 그리고 꽤 잘한다. 


더군다나 오늘은 약속 없이 단순히 소음 때문에 나갈 생각이었는데 공사 소음이란 것이 내 기준에서는 지극히 미비하다. 아마 본격적인 공사 진행을 하는 날이 아닌가 보다. 해서 내 외출은 그렇게 취소됐다. 옷까지 입고 가방까지 메고서도 문밖을 나가지 않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리고선 집에 남아 있던 스파게티 면과 페투치네 면을 탈탈 털어 알리오 올리오를 해 먹었다. 남은 면을 다 넣었더니 그 양이 2인분이다. 파마산 치즈까지 살살 긁어 뿌려주고 다 해치웠다. 


아파트라 위층 아래층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누군지 궁금해서라기 보다는 층간소음 때문이다. 누가 이사라도 가고 이사 오면 그 가족 구성원에 아이들이 있을까 봐 신경 쓰인다. 그게 바로 내 위층이면 더더욱. 지난번 글에는 존재만으로 웃음이 난다고 했지만 그건 내 가까이 있지 않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지 않나.


골목에서 살던 어릴 때는 골목에 누가 사는지 다 알고 서로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같이 놀았다. 엄마들은 서로 음식을 해오거나 함께 만들어 먹었다. 다툼도 많았지만 웃음도 넘쳤다. 그때는 모르고 지나갔던 골목집 추억이 이제 와서 새삼스럽다. 지금은 죄다 아파트고 빌라니 소음에 취약하다. 수평적인 단독주택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수직적인 고층 아파트들로 변하고 나선 서로의 집을 왕래할 일도 서로 같이 놀 일도 없어졌다. 당연히 이해도 배려도 없어졌다. 


어린 시절 생각을 많이 하는 거 보니 나는 분명히 늙어가고 있다. 더 늙기 전에 기어코 생일 쿠폰을 쓰려고 다시 20분을 걸어 스벅에서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를 사 왔다. 얼음이 녹아 맛은 싱거워졌어도 책상 앞에 앉아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유튜브도 보면서 다 마셨다.(유튜브 영상을 더 많이 본 건 비밀이다. 그리고 나는 과제물 추가 접수를 아직 못하고 있다. 내일까지인데 여전히 한 과목의 결론을 못쓰고 있다.) 그러다가 엉덩이랑 허리도 아파져서 사지도 못할 로열 퍼플 방석을 다시 찾아본다. 저 보라색 젤리 덩어리 같은 것이 그 가격이라는 게 믿을 수가 없다. 대신 생뚱맞게 비슷한 색상의 석류즙을 주문하며 내 구매욕구를 채워본다.



- 사진출처 : photo by Orlova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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