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볼파란 Jul 14. 2019

자기기만의 하루

매일마다 내 감정을 흘러내 보려고 시작했지만 역시 매일마다 글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뭔가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 자체로 대단한 거다. 매일마다 출근하기, 매일마다 아침밥 먹기, 매일마다 좋은 일 하기, 매일마다 운동하기, 매일마다... 이게 다 쉽지 않은 일들이다.


꽤 전에 예매해 둔 싼 가격의 프리뷰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것 까지는 좋았다. 주말이라 움직일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에 큰 결심이 따랐지만 어쨌든 나는 움직였다. 공연만 보러 갔어야 했을까?


랜선에서 응원하는 관계는 쉽게 형성된다. 누군가 마음먹고 자신을 다 드러내 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익명성 뒤에 숨은 우리는, 쉽게 마음을 주게 된다. 왜냐면 상대방과 나와는 어떤 관계로도 엮이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만 접속하면 그만이다. 마음을 쉽게 주고 좋아요 하는 것만큼 그것을 거두기도 쉽다. 다시 익명성 뒤로 숨으면 되기 때문이다. 랜선 이모, 랜선 집사, 랜선 우정, 랜선 팬, 등등... 우리는 현실에서 맺지 않는 관계를 컴퓨터와 핸드폰 전원만 켜서 손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런 관계들이 결코 나쁘다는 게 아니다. 마음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은 진심이 움직이게 만들기 마련이다. 상대방의 진심이 느껴지는 것. 그것 만으로 우리는 그들을 응원해주고 싶어 진다.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주말이라 움직인 건 미리 예매해둔 공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응원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오프라인으로 만났고 원하는 만큼 인사도 건넸고 미리 마음먹은 대로 판매하는 제품도 샀다. 문제는 작은 팝업 스토어에 걸린 핸드메이드 제품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비쌌다. 이미 '나'를 밝힌 순간 그것은 익명성의 뒤로 숨을 수도 없다. 핸드메이드 제품이 원래 비싸잖아.라고 생각해 봐도 지금 내 지갑 사정으론 선뜻 사기엔 비쌌다. 그렇다면 몇 가지의 결정이 앞에 놓이게 된다.


A. 꼭 사고 싶었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비싸네요. 하며 나온다.

B. 그중에서 가장 싼 제품을 산다.

C. 그냥 가격 생각 안 하고 마음에 드는 것을 산다.

D. 사람이 들어올 때를 봐서 말없이 그냥 나간다.


A는 이미 랜선 팬임을 밝힌 나로선 하기 힘든 말이다. 그분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B는 그러기엔 가장 싼 제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D는 더 웃기다.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아무 말 없이 들어갔어야 했지만 이미 그분들은 날 알아봤다. 그래서 나는 C를 선택했다. 신용 카드를 긁었고 그건 빚이었다. 들고 나온 제품은 마음에 들었지만 가격 대비 과연 그 가격으로 이 제품을 샀어야 했는지는 판단이 서질 않았다. 사실 사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사들고 나와서 괴로운가. 그건 그분이 만든 제품이 좋지 않다거나 바가지를 씌웠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분과는 전혀 상관없는 괴로움이었다. 말 그대로 한 땀 한 땀 핸드메이드로 만든 제품이고 그분은 분명 합리적인 판단으로 제품 가격을 매겼을 거였다.


이 괴로움은 자기기만의 감정이었다. 뱁새이면서 황새 인척 하는 나를 향한 자기기만. 나는 예전부터 돈 한 푼 없을 지경이 되어도 친한 친구를 만나 '오늘 나 돈 없어. 하루만 네가 사줘'라는 말을 하거나 약속을 미루지도 못했다. 신용카드 현금 서비스를 뽑아서 갔고 말 그대로 빚을 내서 친구를 만났다. 비영리 재단에서 일할 적엔 새 프로젝트를 지인들에게 소개하며 기부 유도하는 걸 내부에서 진행했을 때 나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내 돈으로 때웠다.


바로 그것에서 오는 괴로움이었다. 융통성 하나 없으면서 빚내면서까지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웠다. 원래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자신이다.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자신이다.


영화 토탈 이클립스의 랭보는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참을 수 없는 게 없다는 거야'라고 했지만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나다. 살아가는 건 내내 참기 힘든 나를 마주하는 일이겠구나.


스벅에 멍하니 앉아 가져 온 텀블러에 아이스 라떼를 마시다가 몇 번 안 마셨는데 공용 테이블에 다 쏟아버렸다.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엎질러진 물을 그저 닦아내는 일 뿐.



- 사진출처 : photo by '토탈 이클립스' 스틸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하지 않는 우울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