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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Jul 22. 2019

우울하지 않는 우울증

위에도 뇌가 있단다. 심적으로 힘들거나 마음이 아프면 당장 우리 몸은 신호를 보낸다. 위장 관련 질환 대부분은 이런 스트레스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큰 충격을 받거나 견디기 힘든 일 앞에서 당장 토하고 싶은 기분이 되고 실제로 변기를 붙들고 다 게워내기도 한다.


우울한 기분을 느끼지 않거나 나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도 뇌에서 보내는 신호를 우리 몸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둔다. 그래서 위로 장으로 염증으로 두통으로 끊임없이 S.O.S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병증으로 우울증이 있다. 우울한 기분을 느끼거나 무기력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멀쩡하게 웃고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 우울증을 앓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알지 못한다. 우울하지 않는 우울증. 잘 살고 있다고 끝없이 뇌로 천 번 만 번 되새김질해도 머리는 잠깐 속고 있는 것일 뿐, 감정을 그대로 느끼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기는 우울하지 않는 우울증.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들이라 평온하고 고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하지만 나는 막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괴롭고 그렇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날이 천년만년 지속될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살 수는 없어서 무슨 일이든 해야겠는데 또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드는 밤에는 잠도 잘 수 없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  



집 앞 슈퍼마켓은 어느새 24시간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모든 건 빨리 변한다. 물건도 많아지고 조금 더 편리해진 24시간 편의점 앞에서 맥주 캔을 하나 사서 마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가끔씩 눈이 마주쳤다. 모두 다 지쳐서 발걸음이 느리다. 오늘 하루 모두들, 어디선가 치열하고 힘들었겠지. 나만 안 치열하고 안 힘든데 이렇게 나와서 맥주를 마시려니 미안하다. 할 수 있다면 한 잔 하자고 붙잡고 싶다. 우리 모두 어장 속 물고기처럼 갇힌 줄도 모르고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열심히 살고 있는 거겠지.


그러니 생선, 당신들은 당신의 일을 하고
나는 백수다


매번 드라마 대사를 써먹는데 내가 좋아하던 이 드라마도 이번 주면 마지막이다. 배타미든 송가경이든 차현이든 억대 연봉받는 커리어 우먼들인데 방구석 1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치열하게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는 게 맞는 걸까 싶으면서도 묘하게 위로받는다.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선 자신이 주인공이고 결국 자신의 삶을 가장 잘 위로할 수 있고 의미 부여해줄 수 있는 것도 자신이다.


그러니 진짜 너는 너의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삶을 감당할 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울하지 않는 우울증을 앓더라도.



Blue lamb - Night, 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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