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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Jul 31. 2019

안경

자다가 안경다리를 부러뜨렸다. 대형참사다. 대체 잠을 어떻게 자면 머리맡에 놔둔 안경다리를 부러뜨릴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얼굴을 보니 왼쪽 눈밑부터 뺨까지 쭈욱 선명하게 그어져 있는 자국이 남은 걸로 봐선 얼굴로 짓이긴 것 같은데 내 얼굴이 쇳덩어리도 아닐 테고... 잠에서 깨어 안경을 찾다가 댕강 부러져 있는 걸 보고 어이가 없어 웃음부터 났다.


동생은 집에서 쓰는 안경, 회사에서 쓰는 안경이 따로 있지만 나는 안경을 여러 개 두고 쓰는 편이 아니다. 일회용 렌즈와 번갈아 쓰기도 하고 마음에 들면 계속 쓰는 편이다. 두어 개 정도의 안경이 집에 있지만 아주 오래전에 맞췄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처박아 둔 거여서 스크래치가 심해서 쓸 수가 없다.


임시방편으로 안경다리를 테이프로 칭칭 동여 메고 얼굴에 자국 난 채로 안경을 맞추러 3여 년 만에 안경점에 갔다. 안경 렌즈도 소모품이라 자주 갈아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돈도 돈이지만 귀찮아서라도 안 가게 된다. 아마 나한테는 치과랑 안경점이 거의 동급일 거다. 가긴 가야 하는데 귀찮아서 안 가고 있다가 마지못해 등 떠밀려서 가는 곳.


요새 유행하는 동그랗고 얇은 안경테를 할까 하다가 역시 예전 것과 비슷한 걸로 맞췄다. 10분 정도 기다려 새 안경이 뚝딱 하고 나왔다. 예전에는 며칠 지나서 찾으러 가고 그랬던 거 같은데... 안경점에도 새로운 기계가 도입된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예전 사람인지 몰라도 세상은 참 빠르고 편해져만 가는구나.


'안경'이라는 영화가 있다. 모든 주인공들이 안경을 쓰고 나와 현실에는 없을 것 같은 오키나와 요론 섬에 모여들어 같이 밥을 해 먹거나 빙수를 갈아먹고 아침이면 모여서 체조를 함께 하던 영화였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하나도 얘깃거리가 안될 심심한 영화 같은데 그게 맞다. 심심하고 한적하고 고요한 영화였다. 보고 나면 빙수가 그렇게 먹고 싶어 지는 영화다. 왜 제목이 안경이었을까. 안경을 벗어야만 찾아갈 수 있던 곳이 아니었을까. 세상에서 잘 보던 안경은 정작 그곳에선 무용지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끼고 있던 세상의 것을 벗어던져야 갈 수 있는 곳... 아마 그래서 내 안경을 박살 냈을까는 말도 안 되는 얘기고 어쨌든 얼마 전 일해서 입금된 금액은 고스란히 안경 값으로 날아갔다.






진짜 무서운 건 이별이 아니라 카드 값,
대출 이자 같은 거다



안경을 벗고 잠시 잠깐 일탈을 하거나 힐링을 할 수는 있겠지만 배타미 말대로 진짜 무서운 건 그런 게 아니라 꼬박꼬박 나가는 카드 값이나 대출 이자, 병원비 같은 거겠지. 내 명언집에 배타미 지분이 참 많았는데... 검블유도 끝이 났다. 드라마에서 내내 말하던 건 결국 세 여자의 욕망에 대한 거였다. 배타미, 차현, 송가경 모두 욕망의 생김새나 계기는 모두 다 달랐지만 모처럼 응원하면서 봤다. 특히 세 사람이 지켜내던 포털 윤리 강령이나 개인정보 등에 관한 얘기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 얘기라 생각할 것들이 더 많았다. 요즘은 양질의 콘텐츠나 광고로 수익이 되는 구조가 아니다. 모든 건 숫자와의 싸움이다. 구독자수, 가입자수, 회원수 등등... 그래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 숫자들을 사고 판다. 그들에겐 숫자에 불과하겠지만 그 숫자에 숨어 있는 건 결국 사람들이다.


나는 세상에 배타미, 차현, 송가경 같은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선하기만 한 사람도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하지만 양심과 윤리를 지키며 자신의 욕망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말이다.


이 글은 안경에서 시작해서 욕망으로 끝난다. 전혀 관련 없는 얘기라 생각하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다.


내 욕망엔 계기가 없어. 자랑샷이다. 자랑할 곳이 몇 군데 없다.




*photo by Libby Pe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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