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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Nov 06. 2020

크리스마스에는

거의 몇 달만에 처음으로 스타벅스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보통은 드라이브 스루인을 통해 사 가지고 가는데 이 얼마 만에 매장에서 마시는 건지.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매장 안 플레이 리스트가 달라져 있었다.

빙 크로스비의 '산타 클로즈 이즈 커밍 투 타운'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 벌써 크리스마스야?


어느 순간부터 거리에 캐럴이 흘러나오지 않고

백화점이나 상점들의 크리스마스 장식만이 사람들의 지갑을 노리고 화려한 자본주의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다.


나한테는 스냅사진처럼 머릿속에 박혀 있는 음악과 기억이 있다.

몇 곡에 대한 단상은 예전에 썼지만 얘기하지 않았던 크리스마스의 기억 하나,

음악을 들으면 반드시 이 기억이 소환되는 것이다.

아빠가 회장님 댁 운전기사를 할 때였고 나는 어렸다.

회장님 댁에 버스를 타고 가면서 들었던 노래가 이승환의 '크리스마스에는'이었다.

그날은 눈이 내렸고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회장님 댁에 왜 갔는지 잘은 모르겠다. 왜 하필 나를 데려갔을까.

큰 딸이라 앞세워서 잘 봐달라고 연말 인사를 드리러 간 건지 회장의 생일이었는지 어쨌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의 타워 팰리스처럼 느껴지는 커다란 빌딩 위에 사는 회장댁에 찾아갔더랬다.


마치 TV 드라마 속 잘 사는 회장님 댁을 옮겨 놓은 듯한 집안 구경에 신이 났었지.

이미 누군가가 와서 먹고 마시고 간 자리에 아빠는 회장 집에는 전혀 필요도 없을 것 같은 선물을 드렸다.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고 아이가 왔다며 뭘 주긴 줬었는데 집에 대한 기억만 남은 걸 보면 커다란 집 구경이 훨씬 인상 깊었나 보다.


물론 그 뒤로 수많은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몇 번쯤은 인상 깊은 크리스마스를 지내기도 했지만

여전히 제일 먼저 떠오르는 크리스마스의 기억은 이승환의 노래와 함께 그날의 기억이다.


어린 시절의 끝 무렵 느꼈던 크리스마스는 이렇게나 자본주의적 기억인 셈이랄까.

그렇다고 잘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못 사는 사람들이 불행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일론 신자이긴 해도 나는 개신교 신자이며 적어도 믿음을 갖기 시작한 때부터는 내게 있어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그날의 춥고 눈 오던 날과 버스 안에서 들리던 이승환의 노래와 커다랗고 높은 빌딩 안에 있던 회장님 댁의 기억은 내내 남아 마음을 묘하게 흔든다.


버스 안에서 노래를 들으며 설레고 신이 났던 것 같다.

어려서 미처 몰랐던 게 시간이 오래 흐르고 나서 알게 되면, 그 기억은 슬프고 아름다워진다.

대부분의 어린 시절 기억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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