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고 깨어져 마침내...!
나한테 박해일은 정확히 3등분 되어 있다.
연애의 목적의 박해일, 은교의 박해일, 그리고 헤어질 결심의 박해일.
연애의 목적은 오로지 박해일 미모 때문에 욕을 안 먹었던 역할이었고, 은교의 박해일은 당혹스러웠지만 이런 연기도 하는구나 싶었고, 이번에 헤어질 결심을 보고선 이런 배우였다고?! 너무 잘 늙어줘서(?) 고마웠다.
그러니까 박해일은 좀 신기한 배우다. 배우로서의 존재감은 확실하고 데뷔 때 그의 청초하고 청순한 사슴과 미모 때문에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고 승승장구하여 탑스타가 되었는데 이상하게 연기 외에 그의 사생활과 삶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어 작품 이외에는 어떤 소식도 들을 수가 없다.
깔끔하고 꼿꼿한 군더더기 없는 사람. 그게 나한테는 박해일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기억도 희미했다. 작품으로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만 '어? 박해일이다!' 했다가 다시 가라앉곤 했다. 그게 나한테는 위의 작품들이었다. 그 외에 다수의 작품을 했지만 나한테는 모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작품들이었다.
실제 박해일을 가까이 볼 기회가 두 번 있었다. 2018년 태풍 콩레이 때문에라도 나한텐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줬던 부산 국제 영화제때 지금은 없어진 백화점 '데블스 도어', 지옥의 문에서 그를 봤었다. 이미 개막식 때 훤칠하게 큰 키와 쥐콩 만한 얼굴에 연기 때문에 삭발해서 검정 비니까지 쓰고 온 그를 보고 '와, 정말 사람이 성냥개비 같구나' 싶었는데...(많이 말랐고, 얼굴이 심하게 작았다... 그땐 그랬어.) 아무도 없는 텅텅 빈 식당에서 명란 파스타를 먹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박해일이 왜 여기서 나와?' 그는 인터뷰 때문에 왔었다. 그땐 그저 연예인을 가까이에서 보는 게 신기해서 힐끔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다시 본 건 '한산:용의 출현' GV때였다. 이 영화를 볼 생각은 없어서(초반 졸긴 했어도 그건 내 문제였고, 영화와 연기는 훌륭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의 GV도 그다지 기대가 없었다. 그때 느꼈던 건 박해일이 젊어서는 조금 예민하다고 느꼈었는데 어느덧 중년이 되어 저렇게나 스위트하고 젠틀하게 말을 잘하는 배우가 되었구나. 끝나고 팬들이 들고 온 팻말까지 알뜰하게 다 챙겨가더라.
이 영화, '헤어질 결심'도 사실 보지 않으려고 하다가 넷플에 떠 있어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박찬욱 감독의 멜로라니 평범하지 않을 거 같았고, 형사와 용의자의 사랑이라니 너무 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잘못된 생각이었다. 개봉했을 때 볼 걸... 사람들이 '헤어질 결심' 한창 얘기할 때 같이 얘기할걸. 박해일과 탕웨이 이 두 배우의 연기가, 케미가 가슴을 후벼 팔 정도였다.
이건 수면 위로 올라온 정도가 아니라, 쓰나미가 되어 덮쳤구나. 박해일. 쓰나미박이라고도 하던데.
영화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길어졌네.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그냥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사실 줄거리를 얘기하면 너무 뻔하고 단순해진다.
'사명감이 투철한 품위 있는 형사가 남편 살해 용의자인 여자를 만나 붕괴되는 이야기'
여기서 형사는 해준(박해일)이고, 용의자는 서래(탕웨이)다. 서래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붕괴'의 뜻은 '무너지고 깨어짐'이다. 이 영화는 그러니까 무너지고 깨어져서 종국에는 영원히 미결되는 사랑이야기다. 극 후반에 해준이가 사랑한다고 고백했다는 말을 서래가 하는데, 나는 그 얘기를 듣는 해준의 얼굴만큼 당황했다. 실제로 되돌려보기까지 했다. 내가 안 본 사이에 해준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그러다가 해준의 사랑 고백이 뭐였는지 깨닫게 된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해졌다. 이런 사랑 고백도 있구나.
영화는 1,2부로 나뉜다. 정확히 나뉜 건 아니지만 흐름상 그렇게 진행된다. 1부와 2부 사이엔 13개월의 시간이 존재하고 1부는 부산에서 해준이 서래를 어떻게 사랑했는지가 나오다면, 2부에선 이포에서 서래가 해준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나온다.
해준은 우리가 알고 있던 형사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운동화를 신지만 주머니가 많이 달려 있는 양복을 입고 깔끔하고 꼿꼿하고 품위가 있다. 게다가 용의자 신분으로 신문실에 온 서래를 친절하고 살뜰하게 챙긴다. 아마 해준은 처음부터 서래가 자신과 같은 종족이라는 걸 알았을 거다. 용의자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파고들어야 했지만 끌리는 마음은 어쩌지 못했을 거다.
밤새 서래의 아파트를 감시하며 그녀가 저녁을 아이스크림으로 때우는 것도, TV드라마를 보며 한국어를 배우는 것도, 마침내 우는 것도 지켜봤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는 순간, 직접 자신의 공간으로 초대해서 벽에 붙어 있던 미결 사건 사진도 보여주고 중국식 볶음밥도 대접한다. 그게 아마도 품위 있는 형사로서 그가 서래를 사랑했던 방법이었다. 서래는 불면증이 심한 해준에게 직접 숨결을 맞대고 잠을 재워준다. 불면증이 심한 해준은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었는데 서래의 곁에서는 이상하게 숙면을 취한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하지만 서래가 남편 기도수를 구소산에서 밀어뜨린 것을 눈치채게 되면서, 해준은 서래에게 증거가 되는 핸드폰을 건네며 이별을 고한다. 그 후 해준은 아내가 있는 이포로 오고, 서래는 사기꾼 임호신과 재혼해서 이포로 이사를 온다.
안개 좋아해요
이포는 안개가 늘 있는 동네이다. 서래와 해준의 사랑도 안개와 같다.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고 불안하지만 서서히 스며드는 것처럼... 서래의 남편 임호신이 살해당하자, 해준은 서래에게 왜 그런 남자들만 만나는 거냐고 묻는다. 서래는 오히려 이런 살인사건쯤 나야 만날 수 있는 거 아니냐면서, 해준 같은 바르고 믿음직스러운 남자들은 자신과 결혼해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준은 서래를 의심하고 서래는 해준과 결국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해준을 위해서 서래가 택한 방법은 해준이 자신에게 고백했던 방법과 같은 방법이었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철저한 직업윤리와 사명감으로 일하던 해준은 살인사건의 증거가 되는 폰을 바다에 버려 아무도 못 찾게 하라고 할 정도로 서래를 사랑했다. 그는 자신이 붕괴될 정도로 서래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별을 고하던 그 말이 서래에겐 사랑의 고백이 되었고, 그때부터 서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서래는 바닷가에 구덩이를 파서 스스로 들어가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로 한다. 해준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자신의 존재를 바다에 던져 버리는 일. 그게 서래가 해준에게 한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영원히 미결 사건으로 남는 일. 미결 사건의 사진을 벽에서 떼지 않고 기억한다는 해준에게 미결로 남는 일은 그들의 사랑을 영원히 미결로 봉인해 버리는 일이었다. 이 절절한 고백을 마침내, 해준은 썰물이 밀려온 바다에서 미친 듯 서래의 이름을 부르며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해준은 풀어진 운동화 끈을 고쳐 묶는다. 미결 사건이 된 서래를 그는 평생 찾아다닐지도 모른다. 아마도 내내 불면증에 시달리며 서래를 기억하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불쌍한 여자' 같으니라고...
이 영화는 굉장히 이상한 영화다. 분명히 피범벅 살인 사건의 현장인데, 더군다나 용의자와 형사인데 이토록이나 아름답고 슬프고 처연하고 우아한 사랑 이야기라니. 나 역시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거 같다.
이제 해파리가 되어 잠이 들어보자. 붕괴되어 불면증에 시달릴까봐, 무려 40분에 걸쳐 서래가 재워준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돌아 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 가 다오
아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