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좋아하세요?
슬램덩크를 즐겼던 세대에게 주는 새해 '선물' 같은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젠 엉덩이가 무거워진 데다가 귀찮아져서 극장도 잘 안가는데 무려 조조로 보러 갔다. 일어나자마자 눈곱도 안 떼고 모자 눌러쓰고 동네 극장으로 달려갔다.
세상에 그 아침에도 보러 온 사람들이 6명이나 되었다. 커플을 제외하곤 모두 나처럼 혼자 보러 온 사람들이었는데 30~40대 남자들이 많을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젊은 여성들이었다. 심지어 한 명은 10대 여학생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세대 대통합의 장이로군. 그런데 젊은 세대들한텐 과연 슬램덩크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나한테 슬램덩크는 하나의 문화였다. 만화책으로도 봤고, TV 애니메이션으로도 봤다. 농구에 대한 관심은 고대, 연대로 이어지는 대학 농구의 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물론 만화도 스포츠도 얼빠로 시작해 얼빠로 끝냈던 나로선 끝까지 농구 마니아로 남진 못했지만 아직도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너에게 가고 있어~♬"라는 박상민 씨의 노래를 자동적으로 흥얼거리게 되는 뭐 그런 세대였단 말이다.
"농구 좋아하세요?" 채소연(영화에선 내내 관람석에만 있던 소연이 채치수의 여동생인 걸 모르고 본 사람도 있겠지...)의 한 마디에 심지어 그렇게 싫어하던 농구를 무턱대고 시작한 강백호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며 돌아온 탕아 정대만, 다 귀찮아 하면서도 농구만큼은 절대 양보 못 하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완벽한 서태웅, 단신이지만 넘버원 가드 송태섭, 고릴라 센터 채치수까지... 그뿐이랴, 권준호, 윤대협, 양호열 등.. 지금도 그냥 자동적으로 이름들이 떠오르는 캐릭터들이 많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무려 30년 만에 나온 극장판이고 정말 놀랍게도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감독을 맡아 만들었다. 사실, 날 극장으로 이끈 건 이노우에가 직접 연출했다는 점이었다. 이건 꼭 봐야겠구나. 작화 부분에선 마음을 놓아도 될 부분이었고 되도록 후기를 찾아보지 않고 가려고 했지만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결론은 질질 눈물을 짤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물이 왈칵거렸다. 송태섭 서사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이없게 마지막에 강백호와 서태웅이 하이파이브를 하던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울컥했다. 내가 이걸 보려고 왔구나.
영화는 송태섭의 서사로 이끌어간다. 산왕전을 그리고 있고 중간중간 계속해서 플래시백으로 송태섭의 서사가 나온다. 송태섭의 형과 가족의 이야기가 탄탄하게 그려져서 관객들은 태섭한테 몰입해서 볼 수밖에 없다. 그 사이사이에 우리가 익히 알던 정대만,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의 이야기들도 함께 나온다. 만화로 봤던 명장면들도 많이 나오지만 과감하게 자른 부분도 많다.
만화에서 주인공은 자칭 농구천재라 말하던 강백호였지만 극장판에선 송태섭을 내세웠다.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보지만 나로선 가장 애정하던 정대만과 서태웅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아 아쉽긴 하더라. 서태웅이야 그렇다 쳐도 정대만이 다시 돌아오게 되기까지 잘린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겠지.
나는 그러니까 빨간 머리 강백호로 입덕했다가 서태웅을 돌아 정대만으로 안착한 케이스다. 하하.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불꽃남자. 이 정도면 웹소설 남주 정도급의 서사 몰빵이다. 게다가 잘생겼잖아.
다음 편에는 정대만 시점으로 어떻게 안 될까? 그냥 정대만 이야기는 영화 한 편 뚝딱이라고.
2D인 만화를 어떻게 3D로 구현해 낼까 싶었던 기대감은 200% 충족해 줬다. 그냥 선물을 줘도 고마워했을 판에 뚜껑을 열어 본 그 선물이 정말 명품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N차 관람하는 30~40대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감탄스러웠던 것은 오프닝 장면과 승패를 앞둔 마지막 30초 경기 장면.
송태섭을 필두로 각각 캐릭터들이 2D 연필 스케치로 시작하면서 걸어 나오는 장면은 "내가 이노우에다"라며 다시 돌아온 터미네이터를 보는 듯 경악스러웠다. 슬램덩크 로고가 경기장으로 변하면서 입체감 있는 3D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장면은 정말 감탄 그 자체였다. 3D였지만 2D의 감수성은 잃지 않았다고 생각이 되는 게 마지막 30초에선 빠르게 달리는 장면들이 2D 만화책처럼 속도감을 나타내는 빗금들로 표현되더라.
특히, 30초 동안 어떤 음악이나 대사 하나 없이 경기가 진행되는 데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해진다. 누가 그때 팝콘을 먹은 사람은 뭘 해도 안 될 사람이라고 써놨던 데... 동의한다. 그때는 그냥 숨도 쉬지 말아야 한다. 입틀막, 그 자체거든. 이미 알고 있는 경기의 승패인데도 그냥 그렇게 보게 만드는 건 대단하다.
경기 또한 속도감과 현장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모션캡처로 한 건지 캐릭터 한 명 한 명 모두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강백호가 구석에서 계속 손들며 자신한테 보내라고 하는 것까지 다 보인다. 왜 자막과 더빙으로 두 번은 봐야 하는지 자막으로 보고 나니까 알겠더라. 아바타도 안 보러 갔는데 슬램덩크는 더 보러 갈 용의가 있다. 나 같은 사람한테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쿠키까지 다 보고 나와 정류장에서 극장에서 함께 봤던 10대 소녀를 다시 만났다. 슬램덩크 어떻게 봤는지 물어보고 싶은 거 꾹 참았다. 슬램덩크를 알지 못한 세대가 봐도 무방하지만 모든 캐릭터들의 서사와 관계성을 알기 위해선 만화책으로 보고 봐야 더 풍부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마, 이 학생은 내가 느낀 추억까진 모르겠지. 이제보니 서태웅과 강백호의 하이파이브를 보고 왜 눈물이 났는지 알 거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