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의 날에 피범벅의 세계에서 받은 어떤 위로
넷플에 떠 있던 길복순(내 취향이 아니었다)으로 스트레스 풀기 실패 후, 뒤늦게 보기 시작한 '주술회전'(심지어 아껴보고 있음)으로 덕력이 차오르던 중에 '존윅 4' 개봉 소식을 들었다. 전 시즌 3편을 모두 다 봤지만 극장에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터라 이번에도 사실 극장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보고 오세요. 스트레스 풀려요."
그렇다. 직장 동료의 이 말이 아니었다면 안 갔을 터. 길복순도 직장 동료가 스트레스 풀기용으로 권했던 작품이었다. 우리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약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기분이라 모두 스트레스 푸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생각해 보니까 브런치 글도 항상 힘들 때만 쓰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글이야말로 나의 스트레스 풀기용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이곳에 글이 안 올라오는 것이 내가 가장 잘 살고 있다는 뜻이 되겠지.
그래서 갔다. 존윅 시리즈야말로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가장 안전한 세계에서 스트레스 풀 수 있으니까. 존윅 시리즈가 성공한 데는 이 점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안전한 세계'에서 이뤄지는 아드레날린 폭발. 무슨 말인가 하면 킬러들의 세계라 정말 무수하게 많이 죽이고 수없이 잔인한 장면들이 나오는데 그게 괜찮다. 왜냐면 현실과의 연결고리가 없다. 그러니까 현실적인 뉴욕, 파리, 일본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이 피해를 입거나 경찰이 잡으러 온다거나 감옥에 갇히는 그런 장면이 하나도 없다.
오로지 서로 죽고 죽이는 킬러들의 세계이고 심지어 비무장지대인 세계 각 지점별로 있는 콘티넨털 호텔, 문신과 화려한 화장을 한 언니들이 아날로그 갬성으로 중개하는 정보센터, 서로의 피로 빚진 것을 건네주는 표식, 총이 난무하지만 엄중한 규율이 존재하는 최고회의로 구성된 세계, 인간보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것까지. 이건 마치 오타쿠 판타지 요소들이 곳곳에 숨어져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안심하고 '스트레스 풀어볼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솔직히 존윅 시리즈엔 스포가 중요하지 않다.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존윅인데...
그저 존윅이 자유를 얻었는지, 평안에 이르렀는지가 중요할 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이번엔 어떤 개를 구했는지... 이런 게 더 중요하지.
이 모든 게 이번 4에서도 다 구현되었다. 계단 씬에서 극장 안 사람들이 다 터졌다. 한숨과 웃음이 반반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보면 안다. 이쯤에서 존윅을 보내주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하고, 저게 저렇게까지 구를 정도인가 싶기도 하고. 왜 키아누가 자신의 대역 스턴트들에게 롤렉스 시계를 돌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씬은 '머나먼 정글'에서 나왔던 'paint it black'이 나오면서 프랑스 개선문 한복판에서 벌어진 레이싱 격투씬이다. 여기서 이곡이 나올 줄이야. 롤링 스톤 버전이 아니라, 마리 라포레의 프랑스 원곡으로 흘러나온다. 센터 언니들이 라디오로 중계하며 하나씩 틀어주던 옛날 곡들이 다 좋았다.
이번 존윅 4에선 정말 3시간 내내 할 수 있는 모든 액션이 다 나온다. 심지어 드론 풀샷으로도 잡아줘서 진짜 게임 보는 것 같았다. 쿠키까지 다 보고 나니 존윅 5가 나와줘야 할 것 같다. 물론 키아누 더 늙기 전에 우선 콘스탄틴 먼저 개봉해 주고.
어쨌든 근로자의 날에 이렇게 스트레스를 풀고 회사에 출근할 수 있어 다행인가. 오늘도 근무하는 모든 근로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노동이 거지같아도, 어떤 것을 해도 거지같기 때문에 돈 벌기 위해서는 해야겠지. 나나미처럼 주술사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