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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Sep 06. 2023

너구리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첫 번째 묘비명 

내신 등급 한 등급만 올리라던 고3 담임이 싫어 나는 내신 등급 한 등급을 더 떨어뜨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건 물론 핑계고 담임을 싫어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일부러 성적을 떨어뜨린 건 아니고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머릿속이 내내 딴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몽상가 기질인 난 사실 공부엔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집안이 어렵지 않았다면 미술을 했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동생처럼 미리부터 돈 벌겠다고 상업계학교에 진학할 용기도 없었다. 해서 그저 물처럼 흘러 인문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망한 고3 성적으로 딱히 갈 곳도 마땅치 않아 실기를 보지 않아도 되는 2년제 디자인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에 의해 노동요 배우고 학과 티 입고 머리끈 질끈 동여매고 등록금 인상에 대한 반대 시위에 잠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건 다 한 때였고, 곧 화려하고 충만한 대학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졸업반 때는 아예 졸작 한다는 핑계로 학교와 친구 집을 전전하며 술만 마시고 지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 놀았다. 


취업에 대한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지금 같지 않아서 취업은 당연히 하는 건 줄 알았고 내 전공을 살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졸업과 함께 신촌에 있던 컴퓨터 학원 DTP(출판물, 편집인쇄를 위한 전자 편집 시스템) 포트폴리오 과정에 등록해서 취업을 위한 포트폴리오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커다란 포트폴리오 북을 들고 다니며 면접을 봤고 집에서 가까운 문구 팬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기획실 10명의 디자이너들만 따로 떨어져 나와 있던 중견 회사였고 모두 여자였다. 여자 고등학교를 나온 나로선 고등학교의 연장 같은 기분이었다. 3명의 입사 동기들은 각 팀으로 배정받아 사수 언니들과 일하게 되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첫 회식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앉자마자 다들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넌 담배 안 펴?"라는 질문에 간신히 "안 피는데요."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회사 생활이 쉽지 않겠구나라는 직감이 들었는데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니 꽤 즐겁게 일했다. 


사수 언니들은 2명이 1팀으로 총 3개 팀이었는데 각 팀마다 분위기가 전부 달랐다. 개성들이 강해서 지금도 한 명 한 명 다 기억난다. 당시엔 맥 컴퓨터로 막 디자인하던 세대라 당연히 컴퓨터로 일할 줄 알았는데 캐릭터 드로잉부터 시작해서 도안 만들고 시장조사하러 다녔다. 충무로 인쇄소에 언니들 따라다니며 감리하는 것도 배우고, 어떻게 종이 발주를 넣는지, 어떻게 하리꼬미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사장이 때마다 일본에 시장조사를 다녔는데 한 번 갔다 올 때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문구류들을 사 와서 그걸 신입인 우리가 정리하곤 했는데 힘든 것보다 신기한 물건들이 많아서 마치 보물섬에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내가 만든 캐릭터로 문구제품들이 나왔을 때 느꼈던 뿌듯함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자체 캐릭터 개발 말고도 라이선스 제품들도 만들었는데 내가 주로 했던 건 스타크래프트와 텔레토비 시리즈 제품들이었다. 


물론 좋았던 기억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옥상 위에 불려 가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거나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혼이 났던 기억도 있고 언니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데 중간에 끼어 괜히 눈치를 봤던 기억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자들끼리만 지내는 데 말도 많고 탈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팀장 언니는 당시 40살도 안 됐던 30대 후반의 나이였던 것 같았는데 결혼과 연애에 대한 압박감이 만만치 않았다. 20년도 훨씬 전이니 그때만 해도 결혼하기 늦은 나이였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연애가 잘 되지 않았고 걸핏하면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전화기를 때려 부술 듯이 내려놓을 때가 많았다. 


어느 땐가 아침에 출근해 보니 소주병이 바닥에 굴러 다니고 아직 술이 깨지 않은 팀장 언니가 우리를 다 끌고 나가 노래방으로 출근했던 기억도 있다. 기획실만 따로 떨어져 나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실연당했던 팀장 언니와 함께 노래방에서 시작해서 결국 술집에서 그날의 업무가 끝났던 기억이 난다.


3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유럽 배낭여행을 가기 위해서였다. 그때 당시 나는 넓은 세상, 다른 세상에 대한 갈증이 많았다. 회사를 그만둘 때 월드컵이 한창이었고 내 퇴사 파티도 월드컵을 함께 보면서 했기 때문에 기억에 많이 남는다. 직장 사람들과 붉은 티 맞춰 입고 광화문에 가서 함께 응원했고, 술집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동무하고 어울려 보기도 했다. 


나 여행 간다고 언니들이 캐논 여행용 카메라 가방도 선물해 줬었는데 이 가방은 결국 이탈리아 가서 도둑맞았지만 회사 사람들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때였다. 생각해 보면 첫 직장에서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많이 놀러 다니고, 운전면허증도 따고, 첫 해외여행도 떠날 수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내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도약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솔직히 다시 가서 일하라고 하면 그렇게 일하지 않겠지만 첫 번째 직장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첫 직장에서 워낙 다들 친하게 지내서 나는 모든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다 그러는 줄 알았다. 사회생활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종종 첫 직장 생각이 나기도 한다. 


무서운 너구리굴인 줄 알았는데 순한 양들만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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