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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Sep 19. 2023

그래서 저 보러 나가달라는 거죠?

두 번째 묘비명

여행은 짧고, 현실은 길다.


한 달간의 배낭여행에서 돌아오자 곧 현실이 펼쳐졌다. 당시 플래시 붐이 일 때라 나도 내가 만든 캐릭터를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모든 홈페이지를 플래시로 덕지덕지 효과 주는 홈페이지가 많았다. 특히 영화 개봉에 맞춰 프로모션 사이트가 흥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엽기적인 그녀' 사이트였다.


하지만 현실은 당장 일할 곳이 필요했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만 해도 돌아오면 내 삶이 전혀 달라져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때 알았다. 여행이 주는 기쁨은 잠시고 현실은 여전히 똑같다는 것. 왜 그렇게 여행을 가나 했더니 현실이 주는 괴로움에서 잠시 떠나 있을 수 있어서였다.


그렇게 부랴부랴 들어간 곳은 첫 번째 직장보다 훨씬 작은 문구 팬시 회사였다. 나까지 5명이었다. 그땐 잘 몰랐지. 너무 작은 회사는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걸. 사장, 영업 유통을 담당하는 부장, 디자인 총괄 팀장과 나, 그리고 밑에 사원인 디자이너가 한 명 더 있었다.


팀장은 놀랍게도 내가 다녔던 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사람이었고, 면접 후 전 직장에 전화를 걸어 나에 대해 물어봤다고 말했다. 그때 또 알았다. 일하는 '바닥'이라는 것은 굉장히 좁고 어디서든 성실하게 근무하고 마무리를 잘하고 나와야겠구나.


회사 분위기는 나쁘진 않았다. 팀장은 깐깐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같이 일하던 후배 디자이너도 일을 잘하는 편이었다. 처음으로 후배가 생겨서 기뻤던 것도 같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일하는 건물 근처에 도서관이 있어서 책을 빌리러 자주 갔었다.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가는 게 코스였던 것 같다. 몇 년 키우던 토끼가 병들어 죽어서 울면서 다녔던 길도 떠오른다.


하지만 회사 사정은 좋지 않았다. 멀대처럼 키가 컸던 사장은 내내 한숨을 쉬고 다녔다. 어느 날인가 나를 조용히 불러냈는데 그게 뭘 의미하는지 그때만 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충격이 더 컸다.


사장은 사회력이 전혀 없던 내가 듣기에도 답답할 정도로 말을 빙빙 돌려서 하고 있었다. 회사 사정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얘기하더니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뒤 맥락 없이 주절주절 펼쳐놓고 있었다. 빙빙 돌려서 말하고 있지만 30살도 안 된 내가 듣기에도 나보고 나가달란 말을 저렇게 힘들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말고, 그래서 저 보러 나가달라는 거죠?"


화딱지가 나서 말은 막상 그렇게 뱉었는데 손발이 덜덜 떨렸다. 사장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권고사직을 눈앞에서 당하고 있자니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사정이 어려우니 디자이너 3명을 다 데리고 있을 순 없고, 총괄하는 팀장은 있어야 하고, 급여 조금 줄 수 있고 똘똘한 후배는 데리고 있고, 애매한 나를 내보내기로 한 거다.


내가 그다음에 했던 말도 똑똑히 기억나는데 실업급여를 해달라고 했다. 그때가 내가 받은 첫 번째 실업급여였다.(지금은 세 번째네...) 지금 생각해도 웃긴 게 왜 내가 나가야 하는지 이런 걸 물은 게 아니라 실업급여를 해달라고 한 게 어이가 없는데... 그때도 이미 알았나 보다. 직원의 당연한 권리를 챙겨주는 회사가 많지 않다는 걸.


얼마 일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두 번째 회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물론 사정이 어려워질 줄 모르고 사람을 뽑은 거겠지만 1년도 안된 이력을 이력서에 쓰기도 애매해졌다. 면접 볼 때마다 왜 짧게 근무해야 했는지 설명했었는데 연차가 쌓이면서 경력증명서 제출이나 경력을 꼼꼼하게 보는 회사 제외하곤 이젠 다른 회사와 퉁쳐서 쓴다. 그런 식이면 설명해야 할 회사가 한 둘이 아닌 데다 경력이 오래되면 초반 회사 경력이 중요하지 않다.


가만 생각해 보면, 첫 단추가 잘못된 게 아니라 두 번째 단추부터 잘못 끼웠던 것 같다. 이때부터 내 커리어가 완만하게 하강하게 되었던 것 같아. 배낭여행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회사 선택은 후회한다. 


그땐 몰랐었지. 경력이 없는 신인일 때는 회사 규모(5명 이하인 곳은 피할 것), 일을 배울 수 있는 사수, 최소 1년 이상은 근무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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