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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Nov 01. 2023

퇴직금을 1년 단위로 계산하는 이상한 나라의 계산법

다섯 번째 묘비명

회사를 그만두고 꽤 오랫동안 쉬었다.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환승이직을 한 적이 없다. 대부분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에 가까운 시간을 쉬다가 들어갔다. 그래서 돈을 모으지 못했다. 어쩌겠는가. 내 DNA에 베짱이가 새겨져 있는 걸. 나는 게으르고 놀고먹기 좋아하는 태생이고, 거기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낙천적인 미래를 그리는 편이라 놀고먹어도 하나도 불안하지 않다.(라고 하면 뻥이고, 불안을 일부러 외면하는 쪽에 가깝다.) 


친한 친구 중엔 회사를 그만두고 맘 편히 쉬어 본 적이 없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회사 그만두고 한 달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자신도 모르게 미친 듯이 일을 알아보고 여기저기 검색을 해본다. 서로 신기해하는데 아무리 그러지 말아야지 해도 "이참에 좀 쉴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이번에도 몇 달을 쉰 끝에 여의도에 있는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기업에 납품하는 솔루션을 개발하는 업체였고 연구소라 명명한 부서에 프로그래머들만 3~4명 있는 그리 크지 않은 회사였다. 나는 프로그래머들이 개발한 솔루션 프로그램에 디자인을 입혀야 하는 GUI 디자이너로 입사한 셈이었다. 물론 그것만 한 건 아니고, 작게는 명함부터 시작해서 온갖 전시회, 홍보용 인쇄물, 심지어 액자 하나 거는 것도 나 불러서 물어봤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는 디자이너가 없던 상황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디자이너가 전지전능한 줄 아는 건지 액자 어디에 걸지, 화분 어디에 놓을지 물어볼 때는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감도 안 잡혔다. 이건 마치 군대 가서 미대 나온 사람 손 들어라! 불러다 놓고 운동장 족구 라인 그리게 하는 거랑 똑같지 않나?


그때 만났던 개발자들이 전부 개성이 강해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디테일한 에피소드를 풀어놓고 싶지만 자제하겠다. 하긴 직원들 뿐만 아니라 사장과 부사장 역시 잊지 못하지. 사장과 부사장은 선후배 지간으로 서로 깍뜻하게 대했는데 아마 부사장이 선배였던 듯하다. 


부사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닌 넉넉한 사람이었고, 사장은 하얀 얼굴에 스포츠머리, 늘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매고 다니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각이 잡힌 사람이었다. 일찍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사무실에 있는 화분에 물 주기였다. 꽃을 사랑하는 분이었는지 매번 내 자리 지나갈 때마다 꽃 타령을 해댔다. 


"이 대리님, 얼굴 좀 펴고 있어요. 여직원은 사무실에 꽃이라는 데 얼굴 찡그리고 있으니까 무섭잖아."


지금 같았으면 성차별적 발언에 속하지만 그때는 내가 잘못한 줄 알았다. 모니터 보면서 일하는데 어느 누가 생글거리면서 일할 수 있을까. 게다가 난 웃상도 아니고 아무 표정 없으면 화난 줄 알 정도로 차가운 편에 속한다. 사장한테 그 말 듣고 회사 오기 전에 웃는 얼굴 연습한 게 아직도 억울하고 화가 난다. 

그래서 사장이 물 주러 나올 때가 가장 스트레스였다. 지나갈 때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에 힘을 주게 되고 눈은 하나도 안 웃는데 입은 웃게 되는 괴기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회사는 2년이 채 되지 않아 그만두게 되었다. 사장이 그런 말을 하긴 했어도 특별히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회사 사람들과도 적당히 잘 지냈고, 급여가 밀리지 않았는데도 그만두게 된 건 회사에서 내 일에 대한 포지셔닝 때문이었다. 이건 그 후로도 여러 회사를 다니며 계속 고민이었던 부분이다. 


디자인 회사가 아닌 일반 중소기업에서의 하우스 디자이너가 갖는 포지셔닝이란 과연 지속가능성이 있는가. 답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이다. 나는 지속가능한 포지셔닝을 하지 못했다. 프로젝트성이 강한 일이어서 그랬는지, 솔루션 개발이 끝나고 영업을 다니면서 내가 할 일은 없어졌다. 나가라고 등 떠밀지 않았지만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건 내 성격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을 만들어서 하는 편도 아니라 그만두게 되었다. 차라리 계약직으로 뽑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는 다른 직원도 결혼해서 그만 두게 되어서 이 기회에 그만 두자라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문제없이 그만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딜 가도 복병은 있는 법. 근데 그 복병이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라 뒤통수가 얼얼했다. 


퇴직금이 들어왔는데 내가 생각한 금액과 차이가 났다. 인사관리 담당이었던 부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스몰토크로 화기애애 웃음꽃이 피었다. 하지만 내가 퇴직금에 대해 얘기하니 목소리가 달라진다. 1년 몇 개월에 대한 퇴직금이 들어온 것 같지 않다고 하니, 원래 퇴직금은 일 년 단위로 계산된단다. 


어디서 개가 짖나? 멍멍. 이게 무슨 개소리?

그럼 1년 6개월 다닌 사람은 6개월에 대한 건 못 받느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그럼 퇴사를 1년 단위로 해야 하나요? 따져 물으며 내 목소리 톤이 올라가자 대뜸 말버릇이 왜 그러냐고 정색을 하며 화를 낸다.  


그때부터 손발이 덜덜 떨렸는데 그건 돈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늘 웃으며 친절하게 굴던 양반이 갑자기 180도로 변해서 화를 내는데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났다. 와, 이런 사람이었구나. 역시 믿을 사람 하나 없구나 싶어서. 그후로 다른 회사에서 웃상인 사람에게 다시 한 번 데인 이후로 솔직히 웃상에 대한 신뢰도가 별로 없다.(그저 환하게 잘 웃는 분들에겐 미안. 이걸 편견이라고 하면 편견이겠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니 알아보고 신고하겠다 하고 끊었다. 당시엔 무조건 신고할 생각으로 고용노동부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하니, 신고할 수는 있지만 되도록 사측과 원만한 합의를 권했다. 생각해 보니 지난번 밀린 급여도 신고해서 받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고 심지어 다 받지도 못했다. 신고하겠냐고 해서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당연한 권리를 침해받고 있는데, 그 침해받는 권리조차 제대로 지킬 수 없구나 싶어서 낙담했다. 지금까지 내 퇴사기를 읽은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진짜 돈 갖고 장난치는 데 진절머리가 났다. 화를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면서 못 받더라도 신고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을 때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부사장이 아니라 경영지원팀 소속 새로 온 사원이었다.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면서 남은 몇 개월에 대한 퇴직금을 넣어주겠단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났다. 부사장과 통화하고 싶다고 하니 부재중이란다. 어떻게 퇴직금을 그런 식으로 계산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나한테 소리 지르고 화낸 거 사과받고 싶다고 하니 난처해했다. 


그래, 직원이 무슨 죄겠는가.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머지 퇴직금은 들어왔지만 아직도 궁금한 건, 대체 그런 퇴직금 계산법은 어디서 나온 거며 그만둔 다른 직원들한테도 적용한 건지 아니면 나한테만 그런 건지, 만약 다른 직원들한테도 그랬다면 다른 직원들은 그냥 주는 대로 받았던 건지 궁금하다. 아니면 낚시하듯 그냥 조용히 지나가면 끝이고, 걸리면 나머지 금액을 줬던 것일까? 너무 양아치 아닌가? 


그렇게 해서 아낀 퇴직금으로 배부르고 등따수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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