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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Jan 18. 2017

12. 셰임(Shame).

나는 '나'를 참아낼 수 있는가

shame 미국·영국 [ʃeɪm] 

1. (자기가 한 짓에 대해 갖는) 수치심   2. 창피(해 할 줄 아는 마음)   3. 애석한 일



넌 역겹고
슬픔에 잠겨 있으며
위험한 존재다


영화 초반, 브랜든의 회사 회의 시간에 나온 이 말은 마치 영화 속 브랜든을 설명하는 한 줄 요약 같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는데 두 번째로 보니 이 대사가 확 꽂힌다. 브랜든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슬프고 역겹고 위험한 존재. 뉴욕 여피족인 브랜든은 섹스 중독자이다. 샤워를 하며, 회사 화장실에서, 어두운 뒷골목에서 온갖 포르노로 가득한 그의 회사 하드 드라이브만큼 난잡한 섹스를 즐긴다. 육체는 욕망에 갇혀있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감정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여동생 씨시. 겉으로는 냉정하고 침착하며 젠틀하지만 안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욕망 앞에 무기력하고 슬픔에 잠긴 브랜든과는 달리 씨시는 지극히 감정적이고 불안정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착한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나는 그 도시에서 깨어나고 싶어요.
잠들지 않는 그 도시에서요.
이 작은 마을의 우울들은 녹아 없어져 버릴 거예요.
난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할 거예요.


너무나 다르지만 너무나 닮은 두 사람... 제대로 된 관계를 가져 본 적 없는 브랜든과 허울뿐인 관계에 집착하는 씨시. 그래도 지하철을 기다리며 서있던 두 사람의 모습은 서로를 아끼는 남매의 모습이다. 


- 관계에 대해서요?
- 현실 같지가 않아요.
- 진심이에요?
- 그럼요, 정말이에요.
- 서로에게 신경 쓰지 않을 거라면,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가 뭐죠?
-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회사에서 만난 마리앤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정상적인 데이트를 하고 감정이 생기니 오히려 육체는 거부한다. 절망감에 사로 잡힌 브랜든. 동생 씨시에게까지 자신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키고 맘에도 없는 독설을 퍼붓고 만다. 


이때의 마이클 패스밴더의 표정연기는 뭐라 말할 수가 없다

동생과 싸우고 집을 나온 후, 욕망의 쾌락에 밑바닥까지 몸을 던진 브랜든. 그리고 절정의 순간, 막상 찾아온 감정은 쾌락이 아닌 절망과 수치스러움이다. 포르노에 나올 법한 섹스신은 야한 것이 아니라 공포스럽고 절망스러우며 클래식한 배경음에 만지면 바스러질 것처럼 드라이하다. 


집을 비운 사이 씨시는 다시 자살을 시도한다. 여동생의 손에 가득한 아픔의 흔적들을 이제야 만져본다. 두 사람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병원을 나와 빗속에 젖은 채 결국 무너져 내리는 브랜든.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끝없는 육체의 쾌락과 탐닉. 끝나고 남는 껍데기뿐인 공허함. 언제쯤이면 끝낼 수 있을까? 과연 끝이 있긴 할까?


희망일까. 아니면 회귀일까. 

지하철은 다시 멈췄다. 브랜든은 여자를 따라나섰을까. 아니면 분연히 떨치고 유혹을 이겨냈을까. 그가 진정 원한 것은 끊임없는 자극일까. 아니면 현실감 있는 사랑일까. 


다시 보니, 엔딩이 새롭다. 저렇게 끝났던가. 우연찮게 영화 '더 랍스터'도 생각나는 결말이다. 하지만 더 랍스터가 사랑의 근본에 대한 지독한 우화였다면 '셰임'은 사랑에 대한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소와 비극으로 보인다. 


영화는 감정의 연결 없이 뭔가 뚝뚝 끊어져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더욱 브랜든과 씨시의 비극을 도드라져 보이게 해준다. 파국으로 치닫는 화면에서 조차 느릿하고 슬픈 클래식한 음악이 나와 더욱 비극으로 만드는 것처럼. 영화 내내 브랜든과 씨시는 울부짖지만 화면에서는 이상하리만큼 냉정하고 차분하고 고요하게 보인다. 블루 빛 화면 안에 팔팔 끓고 있는 용암이라도 있는 것처럼.


마이클 패스밴더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다. 이 영화를 찍고 과연 멀쩡했을까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여배우 캐리 멀리건도 인상 깊다. 


우리는 겹겹이 쌓이는 관계들 속에서 얼마나 자신을 보이면서 살고 있을까. 그리고 내가 아는 내가 전부 인 것을 장담할 수 있을까. 나조차도 어쩔 수 없는 치욕스럽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내'가 있을 수도 있다. 


적어도 나는 브랜든만큼은 아니지만 남들한테 말할 수 없는 길티 플레져를 두서너 개 가지고 있다. 토탈 이클립스의 랭보는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참을 수 없다는 게 없다는 거야'라고 말했다. 참아 낼  수 없는 자신을 참아내며 인내하며 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비극일까.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엉망이기도 해.
우리가 나쁜 사람들은 아니잖아.
우린 그냥 그저 잘못된 곳에 있는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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