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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Sep 13. 2016

11. 데몰리션(Demolition)

일상의 작은 틈으로 몰려오는 상실의 파도

죽음에 대하여

죽음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다. 내게 있어 죽음에 대한 경험은 어린 시절 몇 번을 키우다 몇 번을 죽이고 만 병아리에 얽힌 기억과 베란다에서 몇 해를 키우던 토끼의 죽음이 전부다. 나이 든 내 친지의 죽음조차 내게는 실체가 없다. 그러다가 몇 년 전 친할머니의 죽음은 꽤나 충격으로 남아있다. 아흔 살 할머니는 죽음을 직접 선택하셨다. 처음으로 염을 해서 잠든 듯 누워있는 할머니 모습을 보았다. 무색무취의 죽음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서 묘하게 찌그러 들던 내 얼굴이 생각난다. 친할머니의 자살은 쉬쉬 덮어졌고 모두 호상이라며 장례식 장 분위기도 좋았었다. 호상이라... 호상이란 것이 있던가. 슬펐다. 정말 슬펐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지만 그 죽음은 슬펐다. 집안에 그런 슬픈 죽음들은 몇 있었지만 모두 내게는 실체가 없다. 그것은 단지 실체가 없는 죽음에 대한 슬픔이었다.  


친할머니의 죽음 이후로 종종 나는 나를 포함한 내 가족들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슬플 것이다. 그 순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눈물이 차오르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맞이 한다. 거기엔 순서가 없다. 아파서 죽을지 사고가 나서 죽을지 어떤 것도 알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내 가족들의 마지막이 괴롭고 힘들지 않기를 기도할 뿐.



마지막 순간

이 영화는 그 마지막 순간에서 시작한다. 공기처럼 물처럼 바로 옆에 있어서 편안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아내의 마지막 순간 말이다. 그 순간은 느닷없고 충격적이다. 장인의 투자회사에 다니는 성공한 투자분석가 데이비스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출근하는 중이다. 고장 난 냉장고를 언제 고쳐 줄 거냐며 묻는 아내에게 데이비스는 무심하고 심드렁할 뿐이다. 그 순간, 거대한 트럭이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덮치고 만다. 


생과 사는 엇갈린다. 아내는 그 자리에서 죽고 데이비스는 살아남는다. 하지만 딸이 죽었다며 울먹거리는 장인의 말에도 데이비스는 멍하다. 정신이 나간 것인지, 경황이 없어 실감이 안나는 것인지 데이비스는 배가 고프다며 병원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땅콩 M&M을 누르지만 과자는 나오지 않는다. 병원에 항의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병원 소관이 아니라는 말뿐. 


데이비스는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억지 눈물을 짜내거나 엉뚱하게 고장 난 자판기 회사에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하는 짓거리만 봐서는 데이비스는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니! 아내가 죽었는데 어떻게 슬프지가 않단 말인가!

자판기 고객센터에 데이비스는 길고 긴 장문의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누가 받아볼지 읽기나 할지 모르는 항의 편지지만 항의 편지를 가장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 출근을 하는지 출근하는 기차 안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 아내를 어떻게 만나서 결혼했는지 장인어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제 아내가 10분 전에 죽었고요.





일상의 작은 틈 사이로 몰려오는 상실의 파도

그날 이후로 데이비스는 조금씩 변한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일상들이 쉽지 않아진 거다. 제모도 하지 않고 회사로 출근한 데이비스는 회사 화장실 문의 삐걱거리는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기차 안에서 매일 만나던 남자에게 아내의 죽음을 알리며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 후 갑자기 기차의 스톱 버튼을 눌러 기차를 세워 조사를 받기도 한다. 장례식 때문에 와계셨던 부모를 배웅하며 나간 공항에서 2시간 동안 사람들을 관찰한다. 


저 가방엔 뭐가 있는 거지?
그 사람들을 알고 싶어 졌어요.


아내가 떠난 일상의 작은 틈 사이로 상실의 파도가 넘실거리며 들어 온다. 그것은 점차 커져서 데이비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슬퍼하지 않는 자신의 덤덤한 태도에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데이비스는 사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내를 잃은 슬픔을 겪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리라. 괜찮은 게 사실은 전혀 괜찮지가 않은 것이다.


누군가를 잃은 상실은 어떤 방식으로든 애도하고 떠나보내는 치유의 시간들이 필요하다. 그 시간은 한정 지을 수 없으며 사람에 따라 몇 년 몇십 년을 가기도 한다. 상실을 깊게 경험하지 못하고 애도하고 떠나보내지 못할 경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슬픔에 잠겨 상실의 파도에 삼켜져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알고 있다. 감히 짐작할 수도 없겠지만.... 이 영화는 내게 그 상실에 대해 애도하는 방법에 대한 영화이기도 했다. 

오롯이 데이비스 만의 방법으로 말이다-



무언가 고치고 싶으면 모든 걸 뜯어내야 해


무언가 고치고 싶으면 모든 걸 뜯어내야 해.
그리곤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내. 무엇이 널 강하게 만드는지.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건 자동차를 고치는 것과 같은 거야.
모든 걸 검토해야지. 그리고 나서야 다시 합치지. 



장인어른의 입을 빌어, 데이비스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뜯어내고 분해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는 고장 난 냉장고이다. 그다음엔 사무실 자신의 컴퓨터, 회사 화장실의 삐걱거리는 문, 아내가 택배로 배달시킨 에스프레소 머신, 마지막엔 아내와 결혼 생활을 함께 했던 자신의 집마저 부숴버린다. 



어떻게 작동되는지 알고 싶었어요.
떼어내서 바닥에 널어놓고 싶어요.



뜯어내서 부품 하나하나까지 바닥에 널어놓고 분해하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자 하는 것. 어쩌면 데이비스는 아내에 대한 애도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간중간 떠오르는 아내와의 기억은 행복하고 따뜻하다. 기억 속 자신과 아내를 떠올리고서야 데이비스는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는다. 


자판기 고객서비스센터 캐런과 아들 크리스

자판기 회사에 보낸 수통의 편지 후에 정말 기적처럼 새벽 2시에 데이비스가 한창 냉장고를 부술 때 전화가 온다. 자판기 회사 고객서비스센터 캐런으로부터. 


캐런은 데이비스의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인다. 아내를 잃고 방황하는 그를 알고 싶어 진다. 캐런은 혼자 아들을 키우며 자판기 회사 사장과 사귀는 사이다. 대마초에 중독되어 있고 heart가 부른 crazy on you를 들으며 슬퍼하는 여자다. 캐런 역은 나오미 왓츠가 맡았는데 목소리가 너무 근사하다. 초반에 통화하는 목소리에 반할 지경. 자연스럽게 나이 먹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 


캐런에겐 아들이 하나 있는데 크리스다. 보기엔 반항아 같아 보여도 게이인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두려워하기도 하는 아직은 소년이다. 데이비스가 이들을 만나게 되면서 자유로워지는데, 특히 크리스가 듣는 음악을 들으며 거리에서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선글라스를 쓴 채 막춤을 추는 씬은 정말 근사하다. 

  

제이크 질렌할이 이렇게 춤을 추다니 :D


캐런과의 관계는 남녀 간의 관계라기보다는 서로 치유해주는 역할이지 않았나 싶다. 데이비스를 만나며 크리스는 커밍아웃을 했고 캐런은 사장과 헤어졌다. 집을 함께 부수던 크리스가 데이비스에게 주었던 선물은 건물 3채가 무너지는 장면이었다. 과거는 과거로 남기고 캐런과 크리스, 그리고 데이비스에게도 살아가야 할 새로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남아있는 자들에게 남겨진 몫 이리라. 



아내를 보내며...

집까지 허물어 버리고서야 데이비스는 비로소 아내를 떠나보낼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아내의 무덤을 찾아 간 후 우연히 발견 한 차 안 쪽지 한 장.

비 올 땐 나를 못 보겠지만 밝을 땐 나를 생각해
그만하고 나를 고쳐주세요

비로소 차 안에서 아내가 죽고 나서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린 데이비스. 상실을 인정하고 애도하는 기간은 이토록이나 길고 힘든 여정이다. 

줄리아와 전 사랑했어요.
제가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아내를 위한 마지막 선물을 준비한다. 줄리아의 회전목마. 






인상 깊은 영화였다. '더 랍스터'가 사랑의 본질에 대해 묻는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에 대해 묻는 영화였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다시 그 '마지막 순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생각하기 싫은 마지막이란 언제나 오게 마련이고 남아있는 자가 되었든 먼저 떠나는 자가 되었든 우리는 모두 그 순간을 위해 살아간다. 그러므로 당장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사랑의 인사를. 후회가 남지 않도록-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영화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도 인상 깊었지만 '카페 드 플로르'도 무척이나 좋았다. 이 감독의 특징 중 하나는 음악을 참 잘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도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데이비스를 통해 음악들을 적절한 타이밍에 잘 사용했다. 덕분에 OST 매력도 넘친다. 


제이크 질렌할 연기는 날이 갈수록 좋다. 특히 커다란 눈망울을 담은 눈빛이 좋다. 그 눈빛에 모든 것을 표현 할 수 있는 광기가 들어있다. (나이트 크롤러라는 영화에 그 광기가 담겨있다)

엔딩 크레디트에 흐르던 노래를 올리며... 데이비스와 캐런과 크리스가 잘 지내길. 더불어서 우리 모두 잘 지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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