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두려운 당신에게...
올리버는 서른여덟 살에 할로윈 파티장에서 만난 안나와 사랑에 빠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후였다. 올리버의 아버지 할은 13살 무렵 자신이 게이임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45년간의 결혼 생활을 했다. 그리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75살이 되어서야 커밍아웃했다. 올리버의 어머니는 유태인의 피를 이어 받았으며 남편이 게이인 사실을 알고서도 결혼을 감행했다. 당시엔 동성애가 병으로 인정받던 시대였고 어머니는 남편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 생활에 충실했지만 아내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평생을 외로워했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올리버는 아버지마저 떠난 후엔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시작한다는 것이 어렵기만 하다.
안나는 배우이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생활하지만 집보다는 호텔에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안나의 아버지는 호텔에서 묵는 그녀에게 종종 전화를 걸어 자살하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안나는 자유롭지만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관계에서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집보다는 늘 호텔에서 잠을 잔다. 매일매일 청소를 해주고 새로운 침대 시트로 갈아주는 매일매일이 리셋되는 편하고 간편한 곳.
넌 날 잘 모르지만 난 그게 좋아
- 혼자가 되는 건 쉬워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거지
- 한 곳에 머물면서도 사람들과 거리를 둘 수 있어
- 너처럼 말이지?
그렇다면 우린 같은 건가?
'고슴도치 거리'라는 것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찔리지 않고 상처받지 않을 정도의 거리. 서로의 깊은 곳에 있는 어둠을 서로에게 들킬까 봐 우리 모두는 어쩌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손을 맞잡고 사랑을 나눈다. 서로가 서로에게 허락한 공간이 같지 않을 때는 어느 한쪽이 늘 아프다. 그래서 사랑은 늘 두 사람이 같은 크기로 사랑할 수 없다.
멜라니 로랑과 이완 맥그리거는 이 영화로 한 때 스캔들이 났을 만큼 너무 잘 어울렸다. 감독의 연출이 참 좋았는데... 두 사람을 비춰주던 화면들이 더 그렇다.
위의 장면은 우리나라 포스터로 사용되었을 만큼 아름답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함께 바라보던 모든 것들. 한동안 내 블로그와 SNS를 장식하기도 했던 사진들...
넌 왜 사람들을 떠난 거야?
왜 내가 떠나게 내버려 둔 거야?
안나는 호텔 생활을 접고 올리버의 집에 들어오지만 올리버는 새로 시작하는 모든 것들이 어색하고 불안하기만 한다. 처음 만났을 때 올리버의 눈에서 슬픔을 봤던 것처럼 자신과 함께 살면서 행복해 보이지 않는 올리버에게 상처받고 떠나는 안나.
영화는 게이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안나와 만나는 올리버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와 있던 올리버를 교차 편집으로 보여준다. 아버지의 시대엔 허용되지 않던 커밍아웃. 그로 인해 원치 않던 결혼 생활을 해야 했던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용기를 내어 자신의 '진짜' 삶을 시작한다. 그것도 의욕적으로. 젊은 애인을 만들고 게이 모임을 후원하고 책을 펴내고...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한 편으로는 끊임없이 외로워했던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 꺼낼 수밖에 없던 올리버의 감정은 기쁘지만은 않다.
어머니가 꽃을 주며 말하길
"이건 간단하고 행복하지 않니. 이게 내가 네게 주고 싶은 거란다."
간단하고 행복한 것. 그것은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포기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기도 하다. 자신을 드러내고 진짜 삶을 사는 것.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없이 사랑하고 행복해지는 것.
우리는 어떻게 될까?
다시 만난 두 사람.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기꺼이 불편과 불안을 감수하고 시작하는 것. 간단하고 행복한 것을 위해서- 우리는 누구나 삶에서는 비기너들이다. 두 번 살아 본 사람은 없을 테니까-
- 여기서부터는 이 영화의 사족이다. 모든 화면들을 애정한다.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주인공. 이 영화 덕분에 한동안 '아서'앓이를 했었다. 러셀 테리어 종인 '아서'는 아버지 할이 키우던 강아지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선 올리버가 키우게 된다. 거의 주인공급으로 나오는데 심지어 자막으로 대사도 있다. 중간중간 마치 아버지처럼 심오한 대사들을 쳐 주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아서'가 나한테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