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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Apr 08. 2017

15. 트립 투 잉글랜드.

모든 것에 지쳐버린 당신에게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 영화를 봤었다. 하지만 이미 보기 전에 여행의 본질은 알고 있었다. 바뀌는 것은 없다. 다만 잠시 현실을 외면할 수 있는 시간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일 뿐. 그 돈으로 잠시나마 머릿속을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로 채울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그것에 매혹된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영화 '트립 투 잉글랜드'는 마이클 윈터바텀이 만든 '트립 투~' 시리즈의 하나이다. 먼저 개봉한 건 '트립 투 이탈리아'가 먼저지만 만들어진 건 '트립 투 잉글랜드'가 먼저였다.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실제 본인들의 역할로 이름 그대로 나온다. 대본도 없이 간단한 캐릭터의 이야기만 설정한 채 그때그때 촬영했다고 하니 영화라기보다는 어찌 보면 여행 음식 다큐멘터리처럼도 보인다. 영국 북부는 스티브 쿠건과 감독의 실제 고향이기도 하다. 아는 사람들에겐 시인 워즈워스나 광활한 자연으로 유명하지만 나한테는 '폭풍의 언덕'의 배경으로 더욱 유명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야말로 사춘기 소녀였던 내 마음에 휘몰아쳤던 소설 아니었던가. 히스클리프의 눈에 보이던 창문 밖 폭풍이 불어치고 있는 언덕 위의 창백한 캐서린의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사무쳤던가. 이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바로 북잉글랜드다. 



여자 친구와 떠나려 했던 한 매거진의 음식 기행 여행을 친구 롭 브라이든과 떠나게 된 스티브는 마음이 좋을 리가 없다. 두 사람은 많이 다른데, 롭이 이제 막 태어난 아기까지 있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면 스티브는 자유분방한 스타일로 이미 한 번의 이혼 경험이 있고 현재는 여자 친구가 있다. 하지만 여자 친구와의 문제도 쉽지 않고 좋은 작품을 하고 싶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이미 자신은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원하는 역을 따내기가 쉽지 않아졌다.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북잉글랜드를 여행하며 맛집들과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이번 여행이 조금은 힐링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마저도 여자 친구와 가려던 계획이 틀어지며 꼬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행 메이트를 찾던 중 롭과 함께 6일간의 북부 잉글랜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 여행 괜찮을까?


두 사람이 많이 다른 건 서로의 환경뿐만 아니라 스타일도 달랐다. 정말 끊임없이 말하고 성대모사를 해대는 롭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김영철 개그맨이 떠올랐다. 입을 다물지 않는 롭에게 구박을 하면서도 받아쳐주는 스티브. 어느새 성대모사 대결뿐만 아니라 아바의 노래도 함께 흥얼거린다. 두 사람의 끝없는 수다를 듣다 보면 뭐야 싶다가도 문학 작품, 예술가들의 이야기부터 각종 성대모사, 노래에서 자신들의 삶과 나이 듦에까지 전방위 수다의 향연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같이 웃게 되는 순간순간들이 있게 된다. 일테면 렁클뤔 레스토랑에서 나온 육즙이 가득한 조개 요리를 보고 롭이 내뱉은 이 말은 얼마나 웃기면서 슬픈가. 한 마디로 웃프다. 

자기 육즙으로 요리가 된다니. 솔직히 난 육즙이라곤 한 스푼 이상 안 나올 거야.

조개는 육즙이라도 많아서 자기 육즙으로 요리가 된다지만 나이 든 나는 이미 육즙이라곤 한 스푼 이상 안 나온다는 자기희생적인 이 유머에 난 솔직히 파스타 면을 돌돌 말아서 먹다가 낄낄거렸다. 이런 영화는 멀 먹으면서 봐야 입에 침이 고이지 않는다. 영화에는 두 사람의 수다만큼 맛있는 음식들이 많이 나오니까. 



잉글랜드 편은 아무래도 롭보다는 스티브에 초점이 맞춰져서 진행된다. 스티브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사실 행복이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순간들이 있을 뿐 그 실체는 파랑새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그 앞에 놓여 있는 문제는 결코 녹록하지 않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내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황량한 벌판에서 핸드폰이 터지는 자리를 찾아다니며 통화하는 모습은 오히려 쓸쓸해 보인다. 떠나와서도 결코 현실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시시포스의 형벌 같다. 사춘기 아들 때문에 전처에게서 전화가 오고 아들을 타이르기 위해서 아들과 통화하고 여자 친구에게도 전화해서 달래주어야 하고 때때로 에이전시와도 통화해야 한다. 마침 잉글랜드를 떠나 촬영해야 하는 작품의 제안을 받기도 한다. 그는 떠나서 새 출발을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안정적일 것만 같은 중년의 삶은 자신을 둘러싼 이런저런 일들로 불안정하고 매 순간이 위기이다. 


마흔을 넘기면 모든 게 다 피곤해. 우리 또래에는 모든 것에 다 지쳐.



롭에게 털어놓은 중년의 피로함에 격하게 공감하게 되는 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 지쳐버린 표정의 스티브의 표정만큼 내 얼굴의 표정도 그에 못지않게 지쳐있었으니까. 


워즈워스와 콜리지, 폭풍의 언덕, 윌리엄 터너의 그림이 생각날 정도의 아름다운 북잉글랜드의 풍경들 너머로 보이는 것은 중년의 피로한 삶과 떠나도 바뀌지 않는 여행의 본질이었다. 


너를 찾느라고 나는 자주 헤매었지
숲을 지나 또 풀밭 위로,
그런데 너는 언제나 어떤 희망, 어떤 사랑,
늘 그리워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 윌리엄 워즈워스 '뻐꾸기에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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