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어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

도쿄 여행 03

by 볼파란

2017년 10월 11일 수요일


긴자로 넘어가기 전에 식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아시아나 기내식을 먹긴 했지만 형편없는 불고기 덮밥이었다. 튜브 고추장으로 비벼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원래 계획은 긴자의 '효탄야'에 가서 장어덮밥을 먹을 작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아사쿠사에서 먹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배가 고프면 언제 헐크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고 아사쿠사에서도 먹을 곳을 미리 봐 두었다. 역시나 장어덮밥집. '우나테츠'


도쿄에는 장어집이 유명한가 보다. 물론 장어집 말고도 유명한 게 많겠지. 어쩌다 보니 장어집을 골랐을 뿐. 하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장어를 전혀 즐기지 않는 사람이다. 양념장어는 먹어 본 적 없고 장어구이는 몇 번 먹어봤지만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장어를 좋아하는 엄마가 아무리 가자고 해도 꿋꿋하게 가지 않다가 결국 혼자 도쿄에 와서 먹는 첫 끼가 장어라니.


엄마가 알면 서운할 일이라 장어를 먹고 온 것은 끝까지 비밀이다. 허헛. (딸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구나) 한국에서는 모험을 하지 않지만 여행지에서는 모험이 가능하다. 지난번 우니를 처음 먹어 본 것처럼 어쩐지 장어도 도쿄에서 먹으면 맛있을 것 같다. '우나테츠'까지 가는 길에 로손에 들러 지브리 박물관 표를 교환하기로 했다. 로손 100엔 샵엘 들렀는데 이런, 로삐 기계가 없다. 100엔 샵에는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 지점에만 없는 것인지 몰라도 우선 밥을 먹기로 한다.


날은 흐리고 바람도 불고 뭔가 스산한 기운마저 느껴지는데 센소지 근처로 갈수록 백인 관광객들과 전단지를 나눠주는 바람잡이들이 보인다. 센소지를 근방으로 상가들이 발달되어 있는데 이곳은 어떻게 보면 정리 정돈된 명동 같기도 하다. 또 한적한 골목 풍경들이 교토 같아 보이기도 한다. 길에는 자전거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일본은 좌측통행이라 헷갈린다. 다니면서 익숙해질 법도 하련만 매번 자전거가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우왕좌왕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한다. 일본 도로도 좁은 편이지만 길도 좁은 편이라 자전거까지 다니는 것이 나로선 불편한 일이다. 그런데도 불만 한마디 없이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본의 자전거와 사람, 차들의 통행은 볼 때마다 감탄스럽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더 하게 될 것이다. 놀랄 때가 많았으니까.)


우나테츠는 돈키호테 바로 옆에 있다. 파란색 노렌을 걷고 들어가면 작은 1층 홀이 나온다. 1층에 자리가 몇 군데 있고 주방 앞에 바 테이블이 있다. 2층도 있는데 늘 혼자 다니는 나는 늘 바 테이블이 내 자리다. 손님은 1층에 한 테이블 정도다. 1층 손님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내가 다 먹기 전에 나가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본 식당이나 카페는 여전히 흡연이 허용되는 곳이 대부분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다. 담배 연기가 너무 싫은 사람들은 금연 식당을 힘들게 찾거나 흡연 손님이 없을 때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담배 연기가 무척 싫은 사람 중에 한 명인데 의외로 괜찮았다. 아무래도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행지에 가게 되면 까칠함이 무뎌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낯선 곳에서의 살기 위한 본능인가? 암튼, 주문을 해야 했는데 주문을 잘 못했다. 영어 메뉴판을 다 훑어보지도 않고 장어덮밥이 있는 그림 위를 아무렇게나 짚었다.


우나테츠에서 유명한 메뉴는 '히츠마부시'다. 히츠마부시가 뭐냐면, 원래 나고야의 명물 음식으로 따뜻한 밥 위에 장어구이를 잘게 썰어 올린 음식이다. 히츠라 불리는 나무 그릇에 담아 나오는데 이것을 3~4번에 걸쳐 밥공기에 덜어서 먹는 것이다. 첫 번째는 장어와 밥만으로 먹고 두 번째는 김, 와사비, 파 등과 비벼먹고 세 번째는 녹차, 육수 등의 국물을 부어 말아먹으며 마지막으로는 가장 맛있는 방법으로 먹는 것이다.


후기들을 보니, 한국 사람들 입맛에는 두 번째 방법인 와사비, 파 등으로 비벼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고 했다. 나도 이 히츠마부시를 먹으려고 온 것인데 엉뚱하게 일반 *우나쥬를 시켜버린 것이다. (*우나동(볼 그릇), 우나쥬(찬합)에 나오는 일반 장어덮밥을 가리킨다.) 어쩐지 가격이 내가 알고 있던 히츠마부시보다 쌌다. 0.8인분에 2,560엔이다. 긴자의 효탄야는 이곳보다 조금 더 싼 편이다. 하지만 장어라 어딜 가도 가격대가 조금 높다. 이미 주문이 들어가 버린 탓에 히츠마부시든 우나쥬든 기다려 보기로 했다. 나 혼자 와서 2만 원이 훌쩍 넘는 장어덮밥을 다 먹다니. 주문이 들어가면 그때서야 장어를 굽는 지라 조금 기다려야 한다. 그동안 근처 로손을 검색해보고 긴자에 갈 지하철 시간표를 알아본다.


KakaoTalk_20171021_201410563.jpg 히츠마부시는 아니지만 훌륭한 장어덮밥이다.


양념으로 잘 구워진 윤기가 잘잘 흐르는 장어덮밥이 나왔다.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인다. 장어는 젓가락만 가져다 대도 잘 부서진다. 한국에서 구이 먹을 때는 가시들이 많아서 고군분투했는데 여기 장어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 그냥 그대로 부숴서 밥이랑 비벼먹으면 꿀맛이다. 한국에서 양념구이를 먹어보지 않아서 비교할 수는 없으나 장어가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우리나라에도 장어덮밥집이 이런 맛이라면 조금 비싸도 가볼 의사가 있다. 게다가 옆에 나온 국과 양파 샐러드도 훌륭하다. 특제소스에 묻힌 양파를 비벼진 장어덮밥에다가 함께 먹으면 발란스가 좋다. 국물도 육수가 깊게 베어 나온 맛이다. 나는 밥양이 적은 편이라 0.8인분을 먹어도 배가 불렀다. 0.8인분 파는 게 특이하긴 한데 1인분과 얼마나 차이가 날지는 잘 모르겠다.

KakaoTalk_20171021_201410998.jpg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장어덮밥


가게는 친절하지도 딱히 불친절하지도 않았다. 내가 먹는 동안 가게 안에 손님이 없어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담소를 나눴다. 그 모습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가끔 일본인들이라면 무조건 친절할 줄 알고, 과한 친절함을 기대하다가 조금이라도 기분을 상하게 만들면 '혐한'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버리는 사람들을 본다. 하지만 '혐한'이라는 말은 함부로 할 말도 아니고 어딜 가나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도 있는 법이고 가게라고 해서 무조건 과한 친절함을 기대해선 안된다. 일본에 여행 다니면서 느낀 것은 과한 친절함은 점점 사라지는 분위기다. 특히 관광객들이 많은 곳은 더 그렇다. 그렇다고 서비스가 나쁘지도 않으니 특별히 일본이라서 색안경을 끼고 볼일은 없어야겠다.


아사쿠사 역에 가는 길에 로손에 다시 들렀다. 다행히 기계가 한편에 놓여 있다. 지브리 박물관 예약은 미리 한국에서 로손 사이트에 가입해서 해두었다. 해외 결제 카드가 있으면 로손 사이트를 통해 예매하길 추천한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예약하면 메일을 통해 오는 QR코드와 예약 시 기재한 전화번호만 있으면 된다. QR코드를 기계에 인식하면 예약 내역이 나오고 전화번호만 누르고 완료하면 영수증이 나온다. 카운터에서 영수증에 사인만 하면 알아서 지브리 박물관 종이 예매권으로 바꿔준다. 내일 지브리 갈 때 이 예매권과 여권만 가져가면 된다. 여권은 신분증과 마찬가지므로 꼭 가져가야 한다.


첫 날을 긴자로 정한 것은 아사쿠사에서 긴자선으로 한 번에 갈 수 있고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아서이다. 여행 첫 날은 무리한 일정은 잡지 않는 것이 좋다. 긴자에 들렸다가 오다이바도 갈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런 일정은 나한테 무리였다. 그렇다고 긴자를 빼고 오다이바를 가기엔 긴자에 내가 원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고급 문구점 이토야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쇼핑이나 야경, 건담이 우선순위가 아니기 때문에 오다이바를 뺐다. 그렇게 아사쿠사에서 긴자를 바로 가니,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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