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생각보다 예상 범위 안에서 행동했다.
2차 전지 경기는 세계적으로 활황이다. 언론에서는 배터리 기업들이 얼마나 성과금을 줄 것인지 예측하는 기사로 연일 시끄러웠다. 영업이익이 1조를 돌파하는 순간에는 성과금을 주는 것은 당연하고 어느 회사가 얼마나 더 많이 줄 것인가를 놓고 논의가 진행되었다. 옆 동네 배터리 회사는 연봉의 50%를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체 게시판에 성과금 공지가 올라왔다.
[성과금 지급!]
[내용: 여러분! 배터리 시장은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다시 닥쳐올지 모를 위기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금성전자 경영진은 직원들의 격려를 위해 성과급 지급을 결정했습니다. 연봉의 10% 지급!!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뭐야 이거?"
박선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안 되겠는데요?"
박한수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에이...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얘기지 뭐..."
문성근은 그냥 앉아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야? 난 적어도 50%는 준다고 해서 지금까지 버틴 건데..."
장나라는 말했다. 그는 작년에 입사해서 1년 버텼다. 아무래도 성과금을 두둑이 챙겨 받고 퇴사하는 것을 꿈꾼 것 같았다. 옆 동네 배터리 회사뿐만 아니라 동종 업계 대기업들이 연봉의 40~50%를 성과금으로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는데, 금성전자 배터리 사업부의 천문학적인 영업이익에도 불구하고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성과금을 준다는 발표는 직원들의 의욕을 꺾었다. 더군다나 경영진은 수억 원의 성과금을 받아 간다는 소식이 언론 방송에 나와서 직원들의 화를 더했다.
"뭐야 이거? 우리 줄 돈은 없고 윗대가리들 줄 돈은 있다는 거네."
박선준이 말했다.
"일하지 말고 다 같이 들고일어나시죠."
박한수가 말했다.
"이거는 정말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내가 듣다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좋은 방법 있으신가요?"
박선준이 물었다.
"방법이 있죠."
내가 말했다.
난 익명게시판에 접속했다. 이번 성과금 문제로 게시판이 시끄러웠다. 성과금 액수가 책정되는 방식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익명의 작성자들은 산식을 만들어 성과금이 나온 이유를 설명하려 했지만, 대부분의 결론은 배터리 판매 실적에 비해 성과금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신입사원은 채용설명회에서 성과금 액수에 속았다는 글도 있었다. 그러다가 눈에 띄게 높은 조회 수의 글이 있었다. 닉네임은 강병수였고, 추천 수가 50개나 되었지만 비추천은 500개를 넘겼다. 그의 글은 다가올 위기에 대비해 직원들이 양보해야 하며, 조합을 만드는 것은 반사회적이고 기업윤리에 좋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익명게시판에서 반기업적 글을 쓰는 것은 추적하여 블랙리스트에 올릴 수 있다는 협박성 문장으로 끝났다. 글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 뭐야 익명게시판인데 추적한다는 말은? 너 인사팀이냐?
- 뉴스 보니깐 임원들은 1억씩 성과금을 받았던데 우리 줄 돈 모아서 임원 주는 거 아닙니까?
- 이런 글에 누가 이렇게 50개나 추천을 받았죠? 인사팀 인원이 40~50명 되는데 팀원들 동원해서 여론몰이하는 거 아닌가....
- 나는 속 사정을 알고 있다. 조직도에 저 닉네임 강병수를 검색해 보시길....
이 글은 금방 삭제되었다. 나는 닉네임이 잊히지 않아 사내 조직도에 강병수를 검색해 보고 깜짝 놀랐다. 강병수는 실명이었고, 금성전자 기업문화 상무였다. 그는 실수로 본명을 사용해 익명게시판에 협박성 노조 와해 글을 작성한 것이다. 글은 삭제되었지만 캡처본이 여러 직원들에 의해 공유되며 논란은 회사 밖으로 퍼져나갔다.
금성 그룹은 이미지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회사다. 언론홍보실은 기자들에게 돈을 주며 기사화를 막았다. 몇 개의 인터넷 기사가 올라왔다가 금방 삭제되었다는 것은 이를 증명했다. 직원들은 분개했고, 강병수 상무는 조용히 계열사로 전배되었다. 하지만 회사는 분개한 직원들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회사는 직원들을 단순히 ‘관리’ 대상으로 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직원들이 바라는 건 사실 별것 아니다. 그저 공정한 보상과 회사의 이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회사는 매출이 커질수록 자신들만의 산식을 만들어 이익을 최소한으로 나누었다. 더욱이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어 충실한 직원은 더 많은 연봉을, 불충실한 직원은 연봉을 동결하거나 줄이는 식으로 대처했다. 그 결과 나를 포함한 제품팀 박선준과 박한수는 연봉이 줄어들었다.
"와, 너무한 거 아닙니까?"
박선준이 말했다.
"저는 더 심한 꼴을 보기 전에 이직을 준비 중입니다."
박한수가 말했다.
"뭐 어디 갈 데라도 있어요?"
내가 물었다.
"옆 동네 목성 전자 배터리 사업부가 요즘 성과금을 많이 준다더라고요."
박한수가 말했다.
배터리 경기는 계속 호실적을 경신 중이다. 배터리는 공급과 수요에 따라 흐름이 요동치는 산업이다.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며, 21세기 기술의 발전으로 전기차 수요가 급상승하고 있다. 하지만 공급량을 잘못 조절하면 배터리 회사들끼리 가격 경쟁이 벌어지며, 언론에서 말하는 치킨게임이 벌어진다. 지금은 유례없는 호황이라고 언론이 떠들어대고 있다. 인공지능, 자율주행을 말하며 배터리가 모자란다고 한다. 관련 주식도 꿈틀거리며 시장도 요동친다. 결국 박한수는 목성 전자 경력직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장나라는 결혼하고 퇴사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퇴사하고 익명게시판은 다시 한번 들끓었다. 한만두라는 닉네임의 글이 눈에 띄었다.
[제목: 일어납시다.]
[저는 생산부의 한만두입니다. 저는 지난 십 년간 정말 열심히 일해왔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까라면 까고,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했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했습니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건 욕뿐이었습니다. 성과에 대한 공정한 보상?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할까요. 일어납시다.]
이 글은 순식간에 1,000개가 넘는 공감 표를 받았다. 이후로 많은 직원들이 [일어납시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결국 익명게시판 운영은 폐지되었다.
"선배님, 우리도 움직여야 하지 않나요?"
박선준이 내게 말했다.
"익명게시판보다는 내가 전체 메일을 하나 써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말했다.
나는 결국 회사 임직원 모두에게 전체 메일을 보냈다.
[제목: 사장님께 간곡히 올리는 글]
[수신인: 전 직원]
안녕하세요? 저는 고철수입니다. 배터리 경기가 좋아지며, 회사의 경영과 운영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회사의 영업이익이 수십조에 달하며, 임원 성과급은 수억 원에 이르는 이 시기에 직원들의 성과는 무시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본 메일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업계 최고는 아니더라도 동종 업계에 따르는 수준으로 맞춰준다는 리쿠르팅에서 인사팀 직원에게 현혹되어 우리 회사에 오게 된 후배들은 속았다고 하소연합니다. 현재 우리는 동종 업계의 절반 수준입니다. 아래 세 가지를 요청드립니다. 첫째, 영업이익률 대비 성과금 산식을 투명하게 공개해 주십시오. 둘째, 논란이 있는 경우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셋째, 직원이 말할 수 있는 공식적인 소통 채널을 마련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회사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단 하루 만에 전체 공지로 사장님의 답변이 올라왔다. 시원한 답변은 아니었지만 세 가지 요청 사항에 대해 모두 답변했다. 영업이익에 대비한 성과금의 산식을 투명하게 하겠다는 내용, 논란에 대해 해명하겠다는 내용, 보완된 소통 채널을 만들겠다는 내용이 주된 내용이다. 시원치 않지만, 적극적으로 방향을 제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한편으로 주변 사람들은 내 메일에 우려의 마음을 담아 이런저런 말을 하거나 뒤에서 수군거렸다.
“선배님 메일 정말 대박이던데요? 글을 어쩜 그렇게 논리 정연하게 잘 쓰세요? 어디서 배우셨어요? 근데 선배님 인사팀에서 징계당하시는 거 아닌가 걱정이네요. 괜찮으신 거 맞죠?”
박선준이 내게 물었다. 박선준뿐만 아니라 그동안 알고 지낸 여러 선, 후배, 동기들이 내게 물었다.
“괜찮아요. 지금 세상에 그렇게 하면 큰일 나죠. 그 어떤 연락도 없어요.”
그럴 때면 마음속으로 조금 걱정은 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실제로 인사팀으로부터 별다른 연락은 없다. 나 스스로 이미 블랙리스트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중에서 관심 사원으로 우선순위 정도는 더 올라갔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회사 전반적으로 직원들이 무시당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내부적인 분위기가 더 심각하다. 특히 생산부 사람들이 당하는 무시는 누구도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이제는 회사에서 소통 채널도 만들고 리더들의 성격도 바뀌는 과도기에 있다. 리더들이 더불어 모여서 차근차근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리더의 책임이다. 일반 직원들에게는 한계가 있다.
일반 직원은 크게 사무직과 현장직이 있다. 사무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대졸 공채 출신들이다. 현장직은 고졸 또는 초대졸 특채 출신이다. 현장직은 별도의 노동조합이 있고, 별도의 임금협상이 있다.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사무직과는 조금 다른 환경이다. 같은 회사에서 다른 시스템에 있다는 점은 예전부터 이상했다. 이제는 회사의 창립 이후 30년이 넘은 얘기라서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생산부나 테스트 그룹과는 다르게 제품팀에는 별도로 운영하는 현장이 있다. 그 현장은 최근에 여러 공간에서 일하던 현장 직원들을 합쳐놓아서 조직력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현장은 사무실과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전혀 다른 공간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모아두어서 서로 질투와 무시가 만연하다. 게다가 대부분 남자들이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암투는 무시무시하다. 어쨌든, 이번에 속하게 된 미전실 분석 현장은 그동안에 겪은 팀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생산부의 조립팀, 테스트 그룹의 테스트 1팀, 테스트 4팀과는 다르게 현장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제일 크게 다른 점이다. 사무직은 기술개발은 물론이고 현장관리도 해야 한다. 미전실 부천 공장의 제품팀은 어느 정도 기술개발에 업무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데 비해서 금성 공장의 제품팀은 현장관리에 업무 비중이 적지 않게 있다. 현장관리를 위해 생각보다 자주 개발실에 들어가야 한다.
“철수 선배, 현장 가실 거죠? 저도 같이 가시죠.”
박선준이 내게 말했다. 박선준과는 어느새 단짝처럼 단둘이 같이 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우린 천천히 현장으로 이동했다. 개발실의 서늘한 공기를 음미하며 현장으로 들어갔다. 각자 이름표가 붙은 가운을 입으며 라텍스 장갑을 착용했다.
“아, 좀, 비켜.”
어떤 현장 사람이 툭 치고 지나가면서 말했다.
“네?”
우린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현장에서 이동하는 길에 방해되니까 비키라고.”
그는 현장에서 근무하는 사원이다. 현장 근무 직원 50명 중 49명이 남자 사원이고 한 명만 여자 사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무직을 합치면 남녀 성비가 10대 1이다. 남자가 10으로 압도적인 팀이다. 배터리공장 자체가 유별나게 남자의 비율이 높은 편이긴 하다. 공장이 점점 자동화 공장을 표방하며 자동화되면서 현장에 상주하는 직원이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이다. 이렇게 미전실의 제품팀 현장에는 예민한 남자들이 높은 비율로 상주한다.
“멀뚱멀뚱 서서 뭐 해. 비키라고!”
그 사내는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그는 마스크를 착용해서 정확한 이목구비를 알 수 없었지만, 생머리에 까만 피부였고, 키가 작고 왜소하다. 하지만 걸걸한 목소리가 현장을 울렸고, 표정은 성난 개복치처럼 뚱한 표정이었다.
“저희도 일하려고 하는데 왜 그래요? 거 참.”
박선준이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
“아, 짜증나 정말.”
개복치를 닮은 사원이 말했다.
“은수야, 뭔데 그래?”
멀리서 다른 현장 사원이 걸어왔다.
“아, 몰라. 형. 이 아저씨들이 길목에 서서 짜증나게 하네.”
개복치가 말했다.
“사무실 아저씨들이네. 왜 와서 일하는 데 방해하세요?”
또 다른 현장 사원은 압도적인 외모를 갖고 있다. 역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지만, 말총머리에 우람한 체격이 돋보였다. 흡사 몽골을 누비는 대장군 같은 모습이다. 눈매가 날카롭고, 무쌍커풀에 성난 표정이다. 우린 그저 현장의 장비를 관리하려고 내려왔을 뿐인데 길목에서 그들과 2대2로 마주친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다.
“야, 뭔데 이렇게 시끄러워!!”
현장 사무실에서 또 한 사람이 나왔다. 반장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는 개복치보다 더 작은 키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서 사람이 더 작아 보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더욱 현장에 우렁차게 울렸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고 믿기지 않았다. 마스크를 하지 않아서 큰 입으로 마음껏 크게 외치는 말이 멀리 퍼졌다. 작은 얼굴에 눈도 크고 인상을 쓰고 있어서 화가 많이 나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왜 저렇게 사람들이 화가 많을까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다.
“아, 반장님. 저 이번에 옮겨와서 얼마 전 인사드렸던 고철수예요. 잠시 현장에 장비 확인 좀 하려고 왔다가 마주치게 되었어요.”
이쯤 되니 빨리 해명이 필요해 보여서 내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당신들이 누구인지는 알겠는데 대체 뭐 하려고 여기 온 사람들이에요? 당신들 없어도 현장 돌아가는 데 문제가 없어요. 오셔서 방해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야, 너희는 빨리 가서 다시 일해.”
반장이 말했다. 개복치와 대장군은 즉시 대답하며 빠르고 조용하게 자리를 이동했다. 현장 반장의 명령에 즉시 이동하는 모습이 마치 군대같이 완전한 상명하복의 분위기다.
“당신들 자꾸 우리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우리 애들 잘하고 있어요.”
반장은 느닷없이 본인의 할 말을 했다.
“반장님, 우리는 그저 현장 상황을 관리하라고 해서 한 번씩 보러 와보는 거라고요. 자꾸 왜 그러세요. 정말?”
박선준이 발끈하며 말했다.
“선준 씨 전에도 우리 애들하고 말다툼 있었죠? 우리가 잘하고 있는데 와서 자꾸 이것저것 이상한 것들을 물어보니까 잘 되던 일도 더 꼬이잖아요. 우리가 뭐 안된다고 하면 그때마다 와서 봐주지도 못할 거면서 자꾸 왜 그러는데!!”
반장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에휴, 우리가 무슨 죄야. 무시하고 올라가시죠. 선배.”
박선준이 내게 말했다. 반장과 박선준은 각자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었다. 이쯤 되니 소통이 전혀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뒤로도 우리가 현장에 나타날 때면 현장 사원들이 언제나 경계의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박선준이 말하길 처음부터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처음 현장이 통합되고 사무직과 함께 시작했을 때는 다 같이 잘해보자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4조 2교대로 운영하며 조별로 실적을 관리하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통합 전 출신지 별로 자기 식구를 챙겨주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고 조별로 반장에게 불만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사무직 동료가 특정 조 인원에게 몇 가지 제안을 알려주었고 그것으로 좋은 성과를 만들었다. 여기서 질투가 시작되면서 그 불만이 쌓이고 쌓인 모양이다. 반장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더니 조별로 군기를 잡기 시작했다. 여기에 반항하다가는 노동조합에 끌려가서 모진 정신 고문을 당하거나, 몇 명이 일부러 괴롭혀서 스스로 퇴사하도록 만든다. 이미 그렇게 몇 명이 다른 팀으로 쫓겨나거나 퇴사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공산당보다도 더 심한 위계질서가 만들어진 계기다. 알고보면 생각보다 굉장히 무섭고 처절한 현장 사회다. 어찌 보면 그들도 모두 불쌍한 노동자다. 사회가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 실적으로 평가하고 순위를 만들어서 월급이나 승진에 영향을 주게 만든다. 물론 기업에서 실적은 기본이 되는 요소지만,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방향을 기업에서 방조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그저 먹고살기 위해 일하며 인정받는 회사원이 되고 싶을 뿐이다. 최근의 성과급 논란도 그렇고 현장과 틀어진 관계도 그렇다. 그저 우리는 인정에 목마른 사람들이다. 난 고심한 끝에 박선준에게 말했다.
“선준 님, 우리 이제는 누구에게서라도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죠. 남들이 뭐를 어찌하든 무시할건 가볍게 무시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요.”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자 마음이 편해졌다. 무작정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받아들일 부분은 받아들이고 무시할 부분은 가볍게 거르는 방법이다.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사무실에도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물론 상대방이 기분 나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현장을 자주 가면서 현장 사원들이 주로 다니는 동선이 파악되었다. 그들은 언제나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하는 업무가 단순 반복 작업이기 때문에 동선이 단순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동선을 피해서 움직였다. 아주 급한 현장 업무가 아니면 일단 미루고 그들과 마주치지 않을 확률이 높은 시간에 현장을 다녀갔다. 확률은 대부분 적중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예상 범위 안에서 행동한다. 예상 범위를 생각해서 움직이자 그들과 충돌할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