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버지의 해방일지>

내가 알던 아버지는 진짜일까?

by 부소유
정지아 작가의 장편소설


느낀 점 :


그 어떤 정보가 없는 상태로 단숨에 읽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카뮈의 이방인이 생각났지만 읽어낼수록 완전히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인해서 서술되는 이야기가 마치 실화가 아닐까 싶은 기분으로 소설을 끝까지 읽었다. 초반부에는 서사에 나오는 사건들 자체의 개연성이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핍진성이 느껴져서 더욱 높은 몰입도로 읽었다. 중반부에서 후반부까지, 마치 우리가 잘 몰랐던, 혹은 모르고 살았던 돌아가신 할아버지, 또는 우리 아버지의 삶 이면에 이런 모습이 실제로 있지 않았을까 싶은 극도로 현실적인 방언과 묘사가 거칠게 이어졌다.


이 소설의 진짜 탁월한 부분은 장례식의 짧은 시간을 극단적으로 길게 늘려서 인물 간의 갈등과 숨겨진 이야기, 서사를 모두 뽑아냈다는 점이다. 결국 핍진성에서 개연성까지 잡히는 순간 소설이 마무리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사회주의, 빨갱이, 빨치산에 대한 선입견과 그저 어떤 인물의 가족이 되었을 뿐인데 그것으로 인해 겪었을 다양한 인간관계까지 치밀한 상황 묘사로 촘촘하고 세밀하게 뽑아냈다.


줄거리 :


주인공 고아리는 사회주의자, 빨치산, 다시 말해 우리가 빨갱이라고 불렀던 안타까운 역사 속 산증인의 딸이다. 그 이유만으로 그녀의 가족은 연좌제로 오랜 세월, 오랜 시간 국가로부터 각종 불이익을 받으며 국가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국가에 붙잡혀 교도소에 상당 기간 징역을 살다가 출소했다.


아버지는 해방 이후 지리산 근처를 누비며 새로운 세상을 위해 자본주의와 철저하게 싸운 사회주의자였다. 그 아버지는 늙어서는 그저 방에서 새농민 이라는 농사 잡지책을 읽으며 실제 농사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비현실적인 사람이다. 주인공은 그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을 때까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찾아온 아버지의 지인들, 주인공의 지인들, 사촌, 작은아버지, 어머니로 인해 주인공 고아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실제 인생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맞춰지면서 점점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좋았던 부분 :


p66. 별것 아닌 기적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아버지, 혁명가가 아닌 순간의 아버지, 거기서 어린 내가 발견한 것은 뻔한 남자들과 다르지 않은 뻔한 행동이었다. 나이 든 뒤에도 나는 하동집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외로 꼰 채 굳이 외면했다. 내가 외면한 것은 하동댁이 아니라 위대한 혁명가의 외피 속에 감춰져 있을지 모르는 뻔한 남성의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감옥에 있었고, 나는 아버지가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위대한 혁명가라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 아버지가 하동집에서 다른 여자의 둔부를 만졌다는 이유로 아버지에 대한 미약한 존경심과 선입견을 바꾸기 싫어하는 주인공의 고집이 그대로 보인다.


p98. 마지막 가는 길,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음식을 맛있게 먹는 아버지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단 한순간도 유물론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먼지에서 시작된 생명은 땅을 살찌우는 한 줌의 거름으로 돌아가는 법, 이것이 유물론자 아버지의 올곧은 철학이었다. 쓸쓸한 철학이었다. 그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워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사후의 세계를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 주인공이 생각했던 유물론자 아버지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p130. 아버지는 알았을까? 자기보다 한참 어린 막내가 면당위원장인 당신을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했다는 걸, 그 자랑이 당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걸, 그게 평생의 한이 되어 자랑이었던 형을 원수로 삼았다는 걸. 어쩐지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수시로 작은아버지의 악다구니를 들으면서도 돌부처처럼 묵묵히 우리 집이나 작은집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만 뻐끔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는 몰랐을 수도 있다. 아무도 보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그날 작은아버지 홀로 견뎠어야 할 공포와 죄책감을, 보지 않은 누군들 안다고 할 수 있으랴. 역시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만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독한 소주에 취하지 않고는 한시도 견딜 수 없었던 그러한 사정이.


-.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주인공의 자문자답이다. 게다가 평생 이해하지 힘들었을지도 모를 작은아버지의 사정까지 고려하고 있다.


p159. 화환을 보낸 국회의원과는 어떤 관계인가, 정교수인가 강사인가, 이 많은 조문객이 다 네 손님인가, 취조와 다를 바 없는 노빨치산들의 질문 공세를 받느라 나는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목숨을 건 그들 역시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출세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나의 출세 역시 중요한 관심사인 것이다. 나는 조소 또한 식은땀과 함께 흘려보냈다. 아버지도 그랬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시답잖은 학술서 한 권을 출판했을 때, 아버지는 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사논문과 책을 스무 권이나 보내달라 했을 뿐이다. 아무도 읽지 않을 그 책을 동네방네 돌리고 거하게 술턱까지 냈다는 것을, 뒤에야 어머니에게 들었다. 사회주의자라면 농민 자식, 노동자 자식을 자랑삼아야 되는 것 아닌가, 박사라고 좋아하기는, 이러니 사회주의가 망했지, 뭐 그런 정도의 생각을 하면서 나는 기개가 조금도 꺾이지 않은 혁명가처럼 지리산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는 아버지를 내심 비아냥거렸다.


-. 아버지에 대해 쉽게 생각하고 단정 지으려고 하는 주인공의 생각을 장례식장에서의 질문 공세에 이어서 그대로 보여준다.


p217. 시집 안 간 딸자식에게 언니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비수가 꽂힐 때 알았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자식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가족을 등지고 사회주의에 몸담았을 때,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혈육을 뿌리치고 빨치산이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이겠구나. 첫걸음은 무거웠겠고, 산이 깊어질수록 걸음이 가벼웠겠구나. 아버지는 진짜 냉정한 합리주의자구나. 나는 처음으로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점점 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주인공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양가적인 감정으로 보여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빅 픽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