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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세상의 모순, 삶의 모순

by 부소유
소설가 양귀자의 장편소설. 무려 1998년에 출간되어 지금까지 중판과 중쇄를 찍어내고 있는 어마어마한 소설.


완독 결과, 한 여성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순, 삶의 모순을 말한 탁월한 서사였다.


주인공 안진진은 엄마, 그리고 엄마와 일란성쌍둥이인 이모 사이에서, 친동생 안진모와 사촌 사이에서, 이모부와 아버지의 사이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남자인 김장우와 나영규 사이에서, 이런 다양한 관계에서 모순을 겪어낸 보통의 여성이다. 그녀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잘 살아내고 싶었고,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아주 보통의 삶을 살고 싶어 했던 일반 여성이다.


주인공 안진진을 포함한 소설 속의 인물들은 생생하게 살아있었고, 다양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마치 실제 발생하는 일처럼 읽어내는 잔잔했던 마음에 파동을 만들었다. 그 인물들의 면면은 마치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들이라서 더욱 애처로웠고, 그래서 그 사건들을 겪는 상황들이 안타까웠다. 작가는 모든 인물, 사건, 배경을 자연스럽지만 촘촘하게, 점점 더 파고 들어가면서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들었다.


안진진은 이 책의 초반부터 후반부까지 엄마와 이모 사이에서 갈등했다. 겉보기에도 비슷했던 쌍둥이지만 그들의 결혼 이후 겪는 지리멸렬하고 극단적인 삶에서, 가난한 엄마의 삶에 답답해했고, 부유한 이모의 삶을 동경했다. 따라서, 그의 사촌인 주리의 삶과 번듯하게 가장을 책임지는 이모부까지, 안진진에게는 꿈과 같은 삶을 사는 아주 정상적인 가정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타난 두 남자, 김장우와 나영규는 그녀의 마음을 더 흔드는 존재들이었다. 이상은 김장우를 원하고 있지만, 현실은 나영규를 떠올리게 하는 모순적인 상황들이 중첩된다.


여기서 더 안 좋아질까 싶었던 상황에 벌어지는 동생 안진모의 실패, 불행을 갖고 찾아온 아버지의 그림자, 동경의 대상이었던 이모의 비극은 결국 안진진이 이상보다는 현실을 위한 선택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다.



좋았던 부분이 아주 많았지만 일부만 필사해 보았다.


p22.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p94.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이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p100. 내가 누군가에게 정색을 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인지 그것조차 나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내겐 사랑에 꼭 필요한 맹목이란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막 맹목적이지 못한 사랑이 하나 시작되려 하고 있다. 그러나 탐색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선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맹목적이지 못한 사랑의 대가일 것이므로.


p178. 그건 옳지 못한 거야, 라는 주리의 관용구. 주리는 바로 그 관용구 밑에 숨어서 더 이상은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주리는 내 아버지를 킹콩으로 비유했던 그 어린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더 성장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주리를 그만 이해하기로 했다. 탐험해 봐야 할 수많은 인생의 비밀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주리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재미있는 인생의 비밀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말이다.


p257. 사람들은 의외로 사건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말한다. 그럴 줄 알았다. 예감하고 있었던 일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건은 언제나 돌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일이 현실로 드러날 줄은 알았지만, 그 일이 ‘오늘이나 내일’ 일어난다고는 믿지 않는다. 예감 속에 오늘이나 내일은 없다. 오직 ‘언젠가’만 있을 뿐이다. 매일매일이 오늘이거나 혹은 내일인데.


p296.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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