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가서 마음대로 기르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2월,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그때는 믿었다. 진짜로 대학생이 되면 자유로워질 거라고. 지금 생각하면 순진했다. 산타를 믿는 것만큼이나.
입학식 날, 강당에 모인 신입생 360명. 남학생 180명의 머리는 한결같았다. 까만 머리통 위에 잔디를 얇게 깔아놓은 듯한 모양새. 이름하여 '입시형 스포츠머리'. 중학교 때보다 더 짧아진 건 기분 탓일까.
“여러분은 이제 대학입시라는 전쟁터에 발을 들였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전쟁터. 그 단어가 모든 걸 설명했다. 전쟁터에서 긴 머리는 사치다. 아니, 위험하다. 적의 표적이 되기 쉽다. 여기서 적은 누구인가? 입시 경쟁? 사회의 시선? 아니면 우리 자신?
담임은 영어 선생님이었다. 첫 조회 시간, 그는 칠판에 큼지막하게 썼다.
“수능 D-1000”
“여러분, 오늘부터 수능까지 정확히 1000일 남았습니다. 1000일 동안 여러분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연애, 게임, 만화... 그리고 외모에 대한 관심도요.”
누군가 작게 물었다.
“머리 스타일도요?”
“당연하죠. 머리 신경 쓰는 시간에 단어 하나 더 외우세요.”
반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하지만 그건 웃을 일이 아니었다. 진짜로 그렇게 3년을 살아야 했으니까.
첫 중간고사가 끝났다. 성적표를 받아 든 날, 옆자리 친구가 한숨을 쉬었다.
“망했다. 엄마가 머리 더 짧게 자르래.”
“머리랑 성적이랑 무슨 상관이야?”
“엄마가 그러는데, 머리 길면 영양분이 다 머리로 간대. 그래서 뇌에 영양이 안 가고...”
황당한 논리. 하지만 그 친구네 어머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머리 길면 잡념이 많아진대.”
“우리 아빠는 머리 짧아야 집중력이 좋아진다고...”
“학원 선생님이 그러는데 서울대생은 다 짧은 머리래.”
미신 같은 이야기들. 하지만 불안한 학부모들에게는 그것도 하나의 희망이었다. 머리라도 짧게 자르면 성적이 오를지도 모른다는.
여름방학 보충수업. 에어컨도 없는 교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부했다. 앞자리 여학생이 긴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반복했다. 시원해 보였다.
“야, 너도 머리 좀 길러봐. 묶으면 시원해.”
장난스럽게 던진 친구의 말. 하지만 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정말 그럴까? 머리를 묶을 수 있을 만큼 기르면 오히려 시원하지 않을까?
“미쳤냐? 그러다 교무실 불려 가.”
“외국에서는 남자도 머리 긴데...”
“여기가 외국이야?”
맞는 말이었다. 여기는 대한민국이고, 그것도 입시 지옥의 한복판이었다.
2학년이 되었다. 어느 날, 같은 반에 전학생이 왔다. 충격적 이게도 그는 머리가 길었다. 어깨까지는 아니어도 확실히 교칙 위반이었다.
“캐나다에서 왔어요. 거기서는 이게 평범한데...”
그의 설명. 담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적응 기간을 주겠다. 한 달 안에 자르도록.”
하지만 그는 자르지 않았다. 아니, 못 자른 게 맞다. 부모님이 해외 출장을 가셨고, 혼자서는 미용실 가기가 무서웠다고. 변명 같았지만, 우리는 그를 응원했다. 마치 독립운동가를 보는 것처럼.
한 달 후, 결국 교무실에 불려 갔다. 학생부장 선생님의 호통.
“한국 학교에 왔으면 한국 규칙을 따라야지!”
“죄송합니다. 다음 주에 자르겠습니다.”
“다음 주? 당장 오늘!”
그날 오후, 우리는 그가 거의 삭발에 가까운 머리로 돌아오는 걸 봤다.
“괜찮아?”
“응... 시원하네.”
억지로 웃는 그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3학년. 수능 100일 전.
“100일 기도 시작합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외모에 신경 쓸 시간이 없어요. 다들 짧게 유지하세요.”
학년부장의 방송. 그날부터 학교 앞 미용실과 이발소는 대목을 맞았다.
“수능 머리로 해주세요.”
유행어가 된 그 말. 미용사들은 묻지도 않고 자동으로 바리깡을 들었다. 3밀리. 교도소 재소자보다 짧았다.
수능 전날 밤. 어머니가 내 방에 들어오셨다.
“내일 머리 단정하게 하고 가야지?”
“엄마, 이보다 더 짧으면 대머리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침에 물 발라서 정리하고.”
혹시 뭘 모른다는 건지. 머리가 삐죽 나와 있으면 답이 틀린다는 건가?
하지만 나도 물을 발랐다. 그리고 거울을 봤다. 반질반질한 두피가 드러난 18살의 나. 이게 정말 내 모습일까?
수능이 끝났다. 해방감에 들떠 있을 때, 친구가 말했다.
“이제 머리 길러도 되겠다!”
“그래, 드디어!”
하지만 어머니의 대답은 달랐다.
“면접 있잖아. 대학 면접. 그때까지는 단정하게.”
또 미뤄졌다. 자유는 항상 다음을 기약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짧은 머리였다. 졸업앨범을 펼쳐보니 더 가관이었다. 360명의 똑같은 머리. 이름표가 없었다면 누가 누군지 구분도 못했을 것이다.
“대학 가면 진짜 맘대로 할 수 있겠지?”
“당연하지. 거기는 자유잖아.”
우리는 그렇게 믿었다. 또 속았다. 인생은 반복되는 거짓말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중학교 가면, 중학교 때는 고등학교 가면,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면...
‘오늘로 12년의 학창 시절이 끝났다. 12년 동안 내 머리는 한 번도 5센티미터를 넘어본 적이 없다. 이제는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나중에'가 기다리고 있을까?’
창밖으로 고등학교가 보였다. 운동장에서는 새내기들이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있었다. 모두 짧은 머리였다.
역사는 반복된다. 비극으로, 그리고 또 비극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