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장발남 04화

자유라는 이름의 함정

by 부소유

2002년 3월. 대학 입학식.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남학생들의 머리가... 제각각이었다. 염색한 머리, 파마한 머리, 그리고 무엇보다 긴 머리들.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너 머리 진짜 짧다. 재수생이야?”


옆자리에 앉은 선배가 웃으며 물었다. 그는 귀걸이를 하고 있었고, 머리는 턱선까지 내려왔다.


“아니요, 이제 막 입학했는데...”


“아, 그래? 보통 신입생들도 입학하자마자 머리 기르는데. 너도 어서 길러. 여기서 그런 머리는 고등학생으로 오해받아.”


그의 말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머리를 기르라는 조언을 들은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일주일 후, 나는 생애 처음으로 '머리를 기르기로' 결심했다. 아니, 정확히는 미용실에 가지 않기로 했다. 능동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수동적 저항이었다.


한 달이 지났다. 머리가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앞머리가 눈을 찌르고, 옆머리가 귀를 간질였다. 불편했지만 묘한 해방감이 있었다.


“오, 너도 드디어 대학생 같아진다!”


동기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달랐다.


“너 머리 언제 자를 거니?”


“좀 더 있다가요.”


“지저분해 보인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하지만 나는 이제 스무 살이었다. 성인이었다. 내 머리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나이... 라고 믿고 싶었다.


4월, 새내기 환영회. 선배들과의 첫 공식 술자리였다.


“자, 신입생들 자기소개 한 번씩 해봐.”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내 차례가 왔다.


“안녕하세요, 경영학과 02학번 김민수입니다.”


“오, 민수야. 근데 너 머리 좀 기르고 있네?”


3학년 선배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네, 대학 와서 한번 길러보려고...”


“좋아, 좋아. 근데 너무 기르면 안 돼. 보기 안 좋아.”


“그럼 어느 정도가...”


“음, 눈썹은 안 덮는 게 좋지. 남자가 너무 길면 좀 그래.”


순간 혼란스러웠다. 고등학교 때와 뭐가 다른가? 기준이 조금 늘어났을 뿐, 여전히 '적정선'이 있었다.


“형님 머리는 긴데요?”


내 말에 좌중이 웃음을 터뜨렸다.


“야, 3학년 되면 취업 준비해야 해서 다들 자른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마지막 기회.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5월, MT. 펜션에서의 1박 2일. 저녁 바비큐 시간, 4학년 선배가 다가왔다.


“민수야, 너 머리 괜찮네. 어디서 해?”


“아, 아직 안 잘라서...”


“안 잘랐는데 모양이 괜찮다고? 장발이 어울리기 쉽지 않은데.”


그는 자신의 짧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나도 작년까지는 길렀는데, 취업 때문에 잘랐어. 아깝더라.”


“취업하면 꼭 잘라야 하나요?”


“그럼. 면접 때 긴 머리로 가봐. 바로 탈락이야.”


또 다시 '나중'이 등장했다. 취업이라는 새로운 관문.


여름방학. 나는 계속 머리를 길렀다. 이제 진짜 '장발'이라 부를 만했다. 귀를 완전히 덮었고, 뒷머리는 목덜미를 간질였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설면서도 좋았다.


친구들과 해수욕장에 갔다. 바닷물에 젖은 긴 머리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야, 너 완전 록스타 같다!”


“그래? 나쁘지 않은데?”


“근데 학교 다닐 때는 좀 묶고 다녀. 더워 보여.”


머리 묶기.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2학기 개강. 나는 생애 처음으로 머리를 묶고 학교에 갔다. 편의점에서 산 검은 고무줄로 대충 묶었다. 뒤통수가 당기는 느낌이 이상했다.


“어? 너 머리 묶었네?”


“응, 더워서.”


“오, 의외로 어울린다?”


여자 동기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야, 너 그거 여자 머리끈이야?”


남자 동기의 지적.


“그냥 고무줄인데...”


“남자가 무슨 머리를 묶어. 게이 같아.”


2002년의 대한민국. 아직 그런 시대였다.


가을 축제. 록 밴드 공연을 보러 갔다. 무대 위 보컬의 긴 머리가 조명 아래서 춤을 췄다. 멋있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공연이 끝나고 귀가하는 지하철. 옆자리 아저씨가 쳐다봤다.


“학생, 남자지?”


“네...”


“머리 좀 자르지. 여자인 줄 알았네.”


불쾌했지만 참았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12월, 종강 파티.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선배가 말했다.


“민수야, 너 머리 진짜 잘 어울린다. 부럽다.”


“감사합니다, 형.”


“근데 말이야... 군대는 어떻게 할 거야?”


군대.


그 두 글자가 모든 걸 얼려버렸다. 맞다. 군대가 있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2년.


“아직 1학년인데...”


“1학년이면 뭐해. 금방이야.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


마음의 준비. 그것은 머리를 자를 준비였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봤다. 8개월 동안 기른 머리.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라는 걸 알았다.


스무 살, 자유의 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유는 없었다. 그저 조금 더 긴 목줄이 주어졌을 뿐. 군대라는 거대한 가위가 기다리고 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이 머리를 지킬 수 있을까?


창밖으로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짝였다. 내 머리카락도 가로등 불빛에 반짝였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슬펐다.


자유는 늘 조건부였고, 언제나 유예되었다. 스무 살의 나는 그것을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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