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성당에 주교님이 방문을 하셔서 일부러 교중미사에 참석했다. 주교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내 모습을 돌아본다. 성당 안에서 평안하고 열정적인 얼굴로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모습이 과연 성당 밖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주교님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있을 때의 이 얼굴을 늘 간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삶의 증거라고 하셨다.
진정한 예배의 의미는 단순히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 앞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도록 우리를 내보내 달라고 외쳤던 것처럼, 예배는 세상의 권력과 가치관을 거부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따르겠다는 결단이다. 당시 가장 안전하고 풍요로웠던 이집트를 떠나는 것은 무모해 보였지만, 그들은 파라오가 아닌 하느님을 섬기는 길을 선택했다.
우리도 세례를 받을 때 같은 다짐을 했다. 세례의 물에 잠기며 세상의 논리와 가치를 끊어버리고 하느님만을 따르겠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막상 광야 같은 현실을 마주하면 우리는 흔들린다. 이집트의 고기 냄새와 양파 냄새를 그리워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세상의 안락함과 물질의 포로가 되곤 한다.
약속의 땅은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파라다이스가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다. 내가 이곳을 광야로 살지 약속의 땅으로 살지는 오직 하느님을 향한 나의 신뢰에 달려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 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오셨다.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만이 여기를 약속의 땅으로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삶을 생각해 본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앙을 선택하셨다. 열다섯 살에 압록강을 건너 육 개월을 걸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셨다. 사제가 되어 돌아올 때 조국은 이미 순교의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주저 없이 죽음의 땅으로 향하셨다. 불과 육 개월의 사목 활동 후 스물다섯의 나이로 순교하신 그분의 삶은 우리의 계산으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한 발자국, 한 시간이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이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효율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참된 길이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년수로 재고 눈에 보이는 성과로 평가하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깊이와 가치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파도와 바람을 보는 순간 그는 물에 빠졌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약속의 땅에 서 있지만, 시선을 옮기는 순간 광야가 된다. 십자가를 자주 바라보고 그 의미를 묵상할 때, 우리는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묻는다. 과연 나는 하느님을 잘 예배하고 있는가? 나의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가? 휴일의 안락함, 친구와의 만남, 사치스러운 물건들조차 때로는 삶의 걸림돌이 된다. 나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깨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내딛는다. 그것이 약속의 땅을 살아가는 길이다.
읽기와 쓰기도 똑같다. 지금 여기를 약속의 땅, 약속의 시간으로 생각하고 그저 계속 읽고 써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