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은지는 동네 문방구 앞에 서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색연필 세트를 바라보며. 36색 파버카스텔. 2만 8천 원. 미술 시간에 필요하다고 선생님이 말했지만, 은지는 차마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했다. 홍수 이후로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머니 속에는 천 원짜리 두 장이 있었다. 일주일 용돈이었다. 아껴 쓰면 버스비와 간식비로 겨우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돈. 은지는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문방구에서 누군가 나왔다. 준호였다. 손에는 방금 산 듯한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 어? 은지 너 여기서 뭐해? 준호가 물었다. 은지는 - 그냥, 하고 답했다. 준호는 쇼핑백에서 뭔가를 꺼냈다. 60색 파버카스텔이었다. - 이거 샀어. 미술학원에서 필요하대. 근데 나 미술 싫어하는데. 준호는 무심하게 말하며 색연필 세트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 얼마야? 은지가 물었다. - 5만 원인가? 할머니가 사주셨어. 준호의 대답은 가벼웠다. 은지는 속으로 계산했다. 5만 원. 자신의 한 달 용돈보다 많은 돈. 준호에게는 그저 필요 없는 학용품 값. 준호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만 원짜리가 여러 장 보였다. - 배고픈데 떡볶이 먹으러 갈래? 내가 살게. 은지는 고개를 저었다. - 나 집에 가야 해. 준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 그래? 그럼 나 혼자 먹어야겠다, 하고 걸어갔다. 은지는 준호의 뒷모습을 보며 서 있었다. 준호의 운동화는 나이키 신상품이었다. 15만 원짜리. 은지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다. 시장에서 산 만 원짜리 운동화. 벌써 밑창이 닳아 미끄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은지는 할머니 생각을 했다. 지난주에 본 할머니. 고모네 집에서 준호에게 용돈을 주던 할머니. 만 원짜리를 세 장이나 꺼내 주었다. 그냥 왔다는 이유로. 반면 은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니, 은지가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가계부를 쓰고 있었다. 이마를 찌푸리며 계산기를 두드렸다. 은지가 들어오자 급히 가계부를 덮었다. - 학원 갔다 왔니? 어머니가 물었다. 은지는 학원을 끊은 지 두 달이 넘었다. 하지만 토요일마다 도서관에 간다고 나갔다. 사실은 그냥 동네를 돌아다녔지만. - 엄마, 나 색연필 필요한데. 은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니가 - 몇 색? 하고 물었다. - 12색이면 돼. 은지는 거짓말했다. 어머니가 지갑을 열었다.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들이 보였다. - 내일 시장 가서 사자. 거기가 싸. 저녁, 아버지가 들어왔다. 손에 봉투를 들고 있었다. - 은지야, 이거. 아버지가 건넨 봉투 안에는 학용품이 들어 있었다. 연필, 지우개, 공책. - 관리사무소에 납품 온 거 조금 가져왔어. 쓸 만할 거야. 은지는 고마워하며 받았지만, 색연필은 없었다.
그날 밤, 은지는 책상 서랍을 뒤졌다. 동전들을 모아봤다. 100원, 50원, 10원짜리들. 다 합쳐도 1,350원이었다. 한숨이 나왔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민수가 들어왔다. 손에 500원짜리를 들고 있었다. - 누나, 이거 줄게. 여섯 살 민수의 일주일 용돈이었다. - 왜? 은지가 물었다. 민수가 - 누나 색연필 사고 싶다며? 아까 엄마한테 말하는 거 들었어. 은지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괜찮아. 네가 가져. 민수는 고개를 저으며 500원을 책상에 놓고 나갔다.
일요일 아침, 할머니가 왔다. 고모가 데려다준 것이다. 할머니는 들어오자마자 - 준호는 어디 있니? 하고 물었다. 어머니가 - 준호는 고모네 집에 있잖아요, 하자 할머니는 - 아, 그렇지, 하며 멋쩍게 웃었다. 할머니는 소파에 앉아 TV를 봤다. 은지가 차를 가져다드리자 할머니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뭔가를 찾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은지에게 주었다. - 이거 가지고 과자 사 먹어. 은지는 받으며 -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점심 때 고모가 할머니를 데리러 왔다. 고모는 들어오자마자 - 엄마, 준호 학원비 주신다고 하셨죠? 하고 말했다. 할머니가 - 그랬나? 하자 고모는 - 네, 영어학원이요. 50만 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 그래, 줘야지. 우리 준호 공부 잘해야지. 고모가 - 그런데 엄마, 돈 어디 있어요? 하고 묻자 할머니는 - 영희야, 네가 알아서 찾아. 안방 장롱에 있을 거야. 고모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봉투를 들고 나왔다. 두툼한 봉투였다. 은지는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할머니는 준호에게는 50만 원을, 나에게는 천 원을. 50만 원과 천 원. 500배의 차이. 이것이 할머니가 매기는 우리의 가치인가.
고모와 할머니가 떠난 후,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 은지야, 시장 가자. 색연필 사러. 은지는 어머니를 따라 시장으로 갔다. 문구점 아저씨가 - 12색? 싼 거로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3천 원짜리 중국산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머니가 - 은지야, 엄마가 미안해. 좋은 거 못 사줘서. 은지는 고개를 저었다. - 괜찮아요. 이것도 좋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은지가 원한 것은 12색이 아니라 36색이라는 것을. 그리고 중국산이 아니라 파버카스텔이라는 것을. 그날 밤, 은지는 새 색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발색이 좋지 않았다. 뭉개지고 번졌다. 준호의 60색 파버카스텔과는 천지 차이일 것이다. 은지는 그림을 구겨 버렸다.
월요일 미술 시간, 선생님이 - 다들 색연필 가져왔나요? 하고 물었다. 아이들이 하나둘 색연필을 꺼냈다. 대부분 24색 이상이었다. 몇몇은 48색도 있었다. 은지는 12색을 꺼냈다. 옆자리 친구가 - 야, 그거 중국산이지? 하고 물었다. 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은지를 불렀다. - 은지야, 색이 부족하면 선생님 거 빌려줄게. 서랍에서 36색 파버카스텔을 꺼냈다. 은지가 문방구에서 보던 바로 그것이었다. - 다음부터는 이거 써. 은지는 -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오늘 선생님께 색연필을 빌렸다. 친구들은 모두 좋은 색연필을 가지고 있었다. 나만 12색 중국산. 할머니는 준호에게 50만 원을 주고 나에게는 천 원을 주었다. 500배. 이것이 우리의 차이다. 용돈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 가치의 차이. 하지만 민수가 500원을 주었다. 여섯 살 동생이 자기 용돈을 다 주었다. 할머니의 천 원보다 민수의 500원이 더 컸다. 사랑은 액수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차별은 액수로 나타난다는 것도 안다.
새벽, 은지는 잠이 오지 않아 거실로 나갔다. 탁자 위에 어머니의 가계부가 있었다. 살짝 들춰봤다. 빨간 글씨가 가득했다. 마이너스 표시.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그중에 '은지 색연필 3,000원'이 있었다. 은지는 가계부를 덮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2색 색연필을 꺼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천천히, 정성스럽게. 색이 부족하면 덧칠했고, 번지면 다시 그렸다. 새벽 내내 그렸다. 완성된 그림은 우리 가족이었다. 반지하 거실에 모여 있는 다섯 식구. 12색만으로 그린, 조금은 흐릿하지만 따뜻한 그림. 은지는 그림 아래에 제목을 적었다. '우리 가족'.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12색으로도 충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