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명절

by 부소유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1998년 9월 말, 명절 준비로 분주했다. 어머니는 새벽 네 시부터 일어나 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기름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졌다. 은지도 일찍 일어나 도왔다. 동그랑땡을 빚고, 잡채용 당면을 불리고, 나물을 다듬었다. 손끝에 양념 냄새가 배어들었다.


매년 명절은 고모네 집에서 치렀다. 30평 아파트, 13층. 넓은 거실과 큰 식탁이 있는 곳. 하지만 음식은 늘 은지네가 준비했다. 어머니가 이틀 밤을 새워 만든 음식들을 들고 고모네로 가는 것이 명절의 시작이었다. 고모는 떡과 과일만 사놓고 기다렸다.


아버지는 묵묵히 음식을 나르는 일을 도왔다. 김치통, 전 담은 그릇, 나물 통, 잡채 냄비. 양손 가득 들고도 두 번은 왕복해야 했다. 아버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은지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왜 남의 집에서 명절을 쇠는 걸까.


고모네 집에 도착하자 이미 친척들이 모여 있었다. 할머니는 소파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옆에는 고모가, 그 옆에는 사촌 준호가 앉아 있었다. 은지 가족이 들어오자 할머니는 - 음식은 다 했어? 하고 물었다. 인사도 없이. 어머니가 - 네, 어머니, 하고 답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준호는 새로 산 게임기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일본에서 수입한 최신 기종이라고 자랑했다. 민수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준호는 - 너는 만지지 마, 비싼 거야, 하고 말했다. 여섯 살 민수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은지가 민수의 손을 잡아 구석으로 데려갔다.


차례상을 차리는 것도 어머니의 몫이었다. 고모는 옆에서 - 언니, 이건 이쪽에 놓는 거 아니에요? 하며 지적만 했다. 어머니는 - 네, 네, 하며 다시 놓았다. 은지는 접시를 나르며 고모의 매니큐어 칠한 손톱을 봤다. 빨간색이었다. 전 하나 부치지 않은 깨끗한 손.


삼촌이 늦게 도착했다. 강원도에서 온다고 했지만 술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삼촌을 보자 얼굴이 밝아졌다. - 우리 영철이 왔구나, 고생했어. 그리고는 은지 어머니에게 - 영철이 밥 차려줘, 하고 지시했다. 어머니는 차례상 준비 중이었지만 손을 멈추고 삼촌 밥상을 차렸다.


차례가 시작되었다. 남자들이 먼저 절했다. 아버지, 삼촌, 고모부, 준호. 그다음이 여자들 차례였다. 할머니, 고모, 어머니, 은지. 민수는 아직 어려서 절을 제대로 못했다. 은지는 절을 하면서 생각했다. 왜 준호가 나보다 먼저일까. 나이는 같은데.


차례가 끝나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준호에게 가장 좋은 부위의 고기를 집어주었다. - 우리 준호 많이 먹어. 공부하느라 힘들지? 준호는 으스대며 - 저 이번에 전교 10등 안에 들었어요, 하고 말했다. 할머니가 - 역시 우리 준호는 똑똑해, 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지는 전교 5등 안에 들었지만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어머니가 슬쩍 - 은지도 이번에 상 받았어요, 하고 말하자 할머니는 - 그래? 하고만 답했다. 그뿐이었다. 고모가 - 여자애가 공부 잘해서 뭐해요. 시집 잘 가는 게 중요하지, 하고 말했다. 은지는 숟가락을 꽉 쥐었다.


점심 식사 후 어른들은 화투를 쳤다. 고모네 거실 한쪽에 둘러앉아 돈을 걸고 게임을 했다. 삼촌이 계속 잃자 할머니가 용돈이라며 돈을 더 주었다. 아버지는 일찍 따서 일찍 그만뒀다. 그 돈으로 민수 과자를 사러 나갔다.


은지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도왔다. 산더미 같은 그릇들. 기름기 가득한 접시들. 고모는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TV를 봤다. 가끔 부엌에 와서 - 언니, 컵 좀 더 가져다줘요, 하고 심부름만 시켰다. 어머니의 손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오후가 되자 친척들이 더 모였다. 아버지의 사촌들, 그들의 자녀들. 집이 북적거렸다. 아이들끼리 비교가 시작됐다. 누가 키가 큰지, 누가 공부를 잘하는지, 누가 예쁜지. 준호는 자신의 성적표를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은지는 가져오지 않았다고 거짓말했다. 사실은 가방에 있었지만.


저녁 무렵, 고모부가 - 우리 준호 영어학원 보내려는데 한 달에 50만 원이래요, 하고 말했다. 할머니가 - 그래? 비싸네. 내가 좀 보태줄게, 하고 답했다. 은지는 놀랐다. 자신이 학원 하나 끊은 게 한 달에 8만 원이었는데. 그것도 비싸다고 끊었는데.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택시를 타고 가는데 모두가 침묵했다. 민수는 피곤해서 잠들었고, 아버지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부은 손을 주무르고 있었다. 은지는 가방 속 성적표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종이조각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바로 쓰러지듯 누웠다. 아버지는 - 수고했어, 하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지는 어머니의 등을 봤다. 구부러진 등. 하루 종일 일하느라 굽어진 등. 고모의 곧은 등과는 달랐다.


은지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성적표를 꺼냈다. 그리고 찢었다. 조각조각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무슨 소용인가. 아무도 관심 없는데.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데. 여자애가 공부 잘해서 뭐 하냐는데.


오늘 깨달았다. 우리 집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 할머니 - 삼촌 - 고모 - 준호 - 고모부 - 아버지 - 어머니 - 나 - 민수. 이 순서다. 변하지 않는 순서. 타고난 순서. 남자라서, 돈이 있어서, 막내라서 앞서고, 여자라서, 가난해서, 며느리라서 뒤처진다.


새벽, 은지는 목이 말라 일어났다. 부엌에 가니 어머니가 물에 손을 담그고 있었다. 차가운 물에. 부은 손을 가라앉히려는 것 같았다. 은지가 다가가자 어머니는 놀라 손을 뺐다. - 안 잤니? 어머니가 물었다. 은지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갈라지고, 부어오른 손.


- 엄마, 우리는 왜 명절마다 고모네 가요? 은지가 물었다. 어머니는 한참 말이 없다가 - 할머니가 거기 계시니까, 하고 답했다. - 할머니는 왜 거기 계세요? - 거기가 편하시대. - 우리 집은 불편해요? 어머니는 은지를 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 그런가 보다.


은지는 어머니를 꼭 안았다. 어머니의 몸에서 전 냄새, 나물 냄새, 피곤함의 냄새가 났다. 어머니도 은지를 안았다. 떨리는 팔로, 힘없이, 그러나 따뜻하게.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일상이다.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아버지는 관리소 일을, 은지는 학교를. 그리고 고모는 백화점을, 준호는 비싼 학원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명절이 끝나면 늘 그랬듯이.


하지만 은지는 알았다. 명절의 서열은 일상에서도 계속된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줄로 우리를 묶고 있다는 것을. 그 줄은 끊을 수도, 바꿀 수도 없다는 것을. 적어도 지금은.

keyword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