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둘째 주 토요일, 준호의 열세 번째 생일이었다. 고모는 강남의 뷔페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렸다. 초대장이 일주일 전에 왔다. 금박 글씨로 인쇄된 고급스러운 카드였다. 은지는 그 초대장을 받아 들며 자신의 생일을 떠올렸다. 두 달 전, 엄마가 미역국을 끓여주고 케이크 대신 카스텔라를 사 온 조촐한 저녁.
어머니는 며칠 전부터 준호 생일선물을 고민했다. - 뭘 사줘야 하나.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게 뭐니? 은지에게 물었지만 은지도 몰랐다. 준호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어머니는 백화점 상품권 5만 원을 샀다.
생일 당일, 은지네 가족은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갔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민수가 멀미를 해서 두 번이나 쉬어갔다.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고모의 친구들, 고모부의 직장 동료들, 준호의 학교 친구들. 오십 명은 넘어 보였다.
입구에는 준호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턱시도를 입은 준호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찍은 전문 사진이었다. 그 옆에는 선물 테이블이 있었다. 이미 선물 상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은지네가 준비한 상품권 봉투가 초라해 보였다.
홀 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풍선 아치, 꽃장식, 'HAPPY BIRTHDAY JUNHO'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 한쪽에는 DJ 부스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은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게 열세 살 생일파티란 말인가.
할머니는 이미 와 있었다. 메인테이블 중앙에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화려한 한복을 입고 있었다. 분홍색 저고리에 연두색 치마. 머리에는 진주 비녀까지 꽂았다. 할머니 옆에는 준호가 앉아 있었다. 역시 턱시도 차림이었다.
은지네 가족은 구석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메인테이블에서 가장 먼 곳이었다. 주방 문 옆이라 직원들이 계속 드나들었다.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민수가 - 엄마, 우리 왜 여기 앉아? 하고 물었지만 어머니는 - 조용히 해, 하고만 답했다.
뷔페 음식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스테이크, 랍스터, 초밥, 각종 해산물. 은지가 평소에 보지 못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접시를 들고 줄을 섰다. 은지도 일어나려 하자 어머니가 - 좀 있다가 가자, 사람 많아서, 하고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은지는 주변을 둘러봤다. 준호의 학교 친구들은 모두 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 브랜드 로고가 선명했다. 부모들도 마찬가지였다. 명품 가방, 시계, 구두. 은지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작년에 산 검은색 원피스. 벌써 무릎 위로 올라왔다.
케이크 커팅 시간이 되었다. 3단 케이크가 등장했다. 위에는 초콜릿으로 만든 축구공과 트로피가 올려져 있었다. 준호가 축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사회자가 - 자, 이제 우리 준호의 할머니께서 축하 말씀을 해주시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할머니가 마이크를 잡았다. - 우리 준호가 벌써 열세 살이 됐네요. 이렇게 잘 자라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건강하고 공부 잘하는 멋진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는 봉투를 꺼냈다. - 할머니 선물이야. 준호가 봉투를 받으며 - 할머니 감사합니다! 하고 크게 외쳤다.
고모가 옆에서 - 엄마가 백만 원 주셨어요! 하고 말하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백만 원. 은지는 숨이 막혔다. 자신의 생일 때 할머니는 오지도 않았다.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런데 준호에게는 백만 원을.
케이크를 자르고 사진 촬영이 시작됐다. 가족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할머니를 중심으로 고모 가족이 섰다. 그리고 사회자가 - 다른 가족분들도 오세요, 하고 말했다. 아버지가 일어나려 하자 고모가 - 아, 이건 우리 가족만 찍는 거예요, 하고 말했다.
우리 가족. 그 말이 은지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우리는 가족이 아니란 말인가. 같은 할머니의 손자인데, 우리는 다른 가족인가.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앉았다. 얼굴이 붉어졌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어머니가 민수를 데리고 화장실에 갔다. 은지도 따라나갔다. 화장실에서 어머니는 거울을 보며 눈물을 닦고 있었다. - 엄마, 괜찮아요? 은지가 물었다. 어머니는 - 응, 괜찮아. 그냥 눈에 뭐가 들어갔어, 하고 답했다. 하지만 은지는 알았다. 어머니의 눈물이 무엇 때문인지.
홀로 돌아왔을 때 게임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준호 친구들끼리 하는 게임이었다. 상품도 있었다. 게임기, MP3 플레이어, 디지털카메라. 은지와 민수는 구경만 했다. 아무도 그들에게 참여하라고 하지 않았다.
파티가 끝날 무렵, 준호가 은지네 테이블로 왔다. -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는 은지를 보며 - 너도 와줘서 고마워, 하고 말했다. 형식적인 인사였다. 준호는 곧 다른 테이블로 가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모두가 침묵했다. 민수만 - 엄마, 나도 생일파티 저렇게 하고 싶어, 하고 말했다가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창밖만 바라봤다. 한 시간 반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것은 밤 아홉 시였다. 현관에 들어서자 반지하 특유의 냄새가 났다. 습기와 곰팡이가 섞인 냄새. 강남 레스토랑의 향수 냄새와는 정반대였다. 은지는 그 냄새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현실.
어머니가 - 다들 씻고 자요, 피곤하지? 하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TV도 켜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비였다. 차갑고 스산한 비. 반지하 창문에 빗방울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은지는 부모님의 대화 소리에 잠이 깼다. 아버지가 - 내가 더 잘났어야 했는데,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 당신 잘못 아니에요, 하고 답했다. 아버지가 - 우리 애들한테 미안해서, 하자 어머니가 - 우리 애들은 괜찮아요. 착하고 건강하잖아요.
은지는 눈물이 났다. 부모님의 자책이 더 아팠다. 차라리 원망하고 분노하는 게 나을 텐데. 이렇게 자신들을 탓하는 모습이 더 가슴 아팠다. 은지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아침이 되었다. 일요일이었다. 평범한 일요일. 어제의 화려한 파티가 꿈처럼 느껴졌다. 아니, 악몽처럼. 은지는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식탁 위에 어머니가 써놓은 메모가 있었다. ‘일 나갔다 올게. 냉장고에 반찬 있어.’
일요일에도 일하러 가는 어머니. 은지는 냉장고를 열었다. 김치와 멸치볶음, 계란 몇 개가 전부였다. 어제 뷔페의 스테이크가 떠올랐다. 은지는 계란 프라이를 해서 동생을 깨워 먹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동생에게 큰 생일파티를 열어줄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이 반지하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열세 살 은지에게 그 답은 너무나 멀고 불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