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 중학교 배정 통지서가 왔다. 은지는 집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의 동네 중학교에 배정되었다. 평범한 공립중학교였다. 준호는 강남의 사립중학교에 합격했다고 들었다. 입학금만 300만 원이라고 했다. 은지는 통지서를 접어 책상 서랍에 넣었다.
교복을 맞추러 가는 날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학교 앞 교복 매장에 갔다. 매장 안에는 이미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있었다. 직원이 - 어서 오세요, 치수 재러 오셨어요? 하고 물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은 은지를 거울 앞에 세웠다.
줄자로 가슴둘레, 허리둘레, 팔 길이를 쟀다. 직원이 - 표준 사이즈로 하시면 23만 원이고요, 맞춤은 28만 원입니다. 어머니의 얼굴이 굳었다. - 표준으로 주세요. 직원이 - 애가 아직 클 나이인데 맞춤이 나을 텐데요, 하자 어머니는 - 괜찮아요, 표준으로요.
은지는 시착용 교복을 입어봤다. 겨울 교복이었다. 감색 재킷과 체크무늬 치마.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낯설었다. 초등학생이 아닌 중학생의 모습. 하지만 교복이 조금 컸다. 소매가 손등을 덮었고 치마도 종아리까지 내려왔다. 직원이 - 좀 큰데요, 하자 어머니는 - 크면서 맞겠죠, 하고 답했다.
계산대에서 어머니는 지갑을 열었다. 현금으로 23만 원을 냈다. 만 원짜리 23장. 어머니가 아껴둔 돈이었다. 은지는 그 돈이 어머니의 한 달 파출부 일당과 맞먹는다는 것을 알았다. 직원이 - 3벌 세트로 하시면 할인됩니다, 하고 권했지만 어머니는 - 하나면 충분해요, 하고 답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머니가 - 은지야, 교복 아껴 입어야 해. 3년 동안 입어야 하니까. 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중학교 3년 동안 한 벌의 교복으로 버텨야 한다. 여름교복은 어떻게 하지? 은지는 묻지 않았다. 어머니의 주름진 이마를 보면 물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 고모가 전화를 했다. 어머니가 받았다. - 언니, 준호 교복 맞췄어요. 명품 브랜드로 했는데 한 벌에 80만 원이래요. 비싸죠? 그래도 좋은 걸로 입혀야죠. 어머니는 - 그렇네요, 하고만 답했다. 고모가 - 은지는? 교복 맞췄어요? 어머니가 - 네, 오늘 했어요. 고모가 - 얼마였어요? 어머니는 잠시 침묵하다가 - 그냥.. 보통 가격이에요.
전화를 끊고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은지가 - 엄마, 괜찮아요. 나 표준 사이즈 맞아요, 하자 어머니는 은지를 안아주었다. - 우리 은지 착해서 어떡하니. 은지는 어머니의 품에서 세탁소 냄새를 맡았다. 어머니가 일을 하면서 나는 특유의 냄새.
다음 날, 은지는 교복을 다시 입어봤다. 역시 컸다. 거울을 보며 소매를 접어 올렸다. 그래도 길었다. 치마도 한 번 접어 올렸다. 그제야 적당해 보였다. 하지만 접은 자국이 보기 싫었다. 은지는 다시 펴고 그냥 입기로 했다.
일주일 후, 준호가 할머니와 함께 왔다. 새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은지가 본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재질부터 달랐다.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원단. 몸에 딱 맞는 핏. 금색 단추와 교표. 준호가 - 할머니, 어때요? 멋있죠? 하자 할머니가 - 우리 준호 정말 멋있네, 하며 흐뭇해했다.
할머니가 은지를 보며 - 너도 교복 샀니? 하고 물었다. 은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 입어봐라, 하고 말했다. 은지는 방에 들어가 교복을 입고 나왔다. 할머니는 은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 좀 크네, 하고만 말했다. 그뿐이었다.
준호가 - 할머니, 저 학교에서 1등 하면 장학금 준대요, 하고 자랑했다. 할머니가 - 그래? 우리 준호는 당연히 1등 하겠네. 할머니가 장학금 더 줄게. 준호가 좋아하며 할머니에게 매달렸다. 은지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1등 하면 장학금 주실까?
할머니와 준호가 떠난 후, 은지는 교복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준호의 교복과 자신의 교복을 비교해봤다. 80만 원과 23만 원. 3.5배 차이.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품질, 디자인, 그리고 그것을 입는 사람의 자신감.
학교 준비물 목록이 왔다. 실내화, 체육복, 가방, 필기구. 어머니는 목록을 보며 또 한숨을 쉬었다. - 동대문 시장 가자. 거기가 싸. 은지와 어머니는 주말에 동대문 시장에 갔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머니는 능숙하게 흥정했다. - 이거 좀 깎아주세요. 학생이에요.
체육복을 사는데 어머니가 - 큰 사이즈로 주세요, 하고 말했다. 상인이 - 너무 큰데요, 하자 어머니는 - 괜찮아요, 아이가 많이 클 거예요. 은지는 알았다. 어머니는 은지가 3년 동안 같은 체육복을 입기를 바라는 것이다.
가방도 제일 싼 것으로 샀다. 만 원짜리 검은색 백팩. 어머니가 - 튼튼해 보이네, 오래 쓸 수 있겠다, 하고 말했지만 은지는 알았다. 한 학기도 버티기 힘들 것 같은 품질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은지는 옆자리 여학생을 봤다. 똑같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달라 보였다. 명품 브랜드 가방, 나이키 운동화, 아이폰. 은지는 자신의 만 원짜리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가렸다.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뭔가를 들고 있었다. - 은지야, 아빠가 중학교 입학 선물 사왔어. 상자를 열어보니 전자사전이었다. 중고품이었지만 깨끗했다. 아버지가 - 관리사무소 직원이 싸게 판다고 해서 샀어. 공부할 때 도움 될 거야. 은지는 - 감사해요, 아빠, 하며 안았다.
그날 밤, 은지는 새 교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치마를 접어 올리고, 이리저리 맞춰봤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어색했다. 큰 교복은 은지를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은지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생각했다. 이 교복처럼, 나는 언제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야 하는 걸까.
오늘 중학교 교복을 샀다. 23만 원. 준호는 80만 원. 엄마는 크게 샀다. 3년 동안 입으라고. 나는 3년 동안 얼마나 자랄까. 교복만큼 자랄 수 있을까. 아니면 교복은 여전히 클까.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이 큰 교복을 입고도 당당하게 걸을 것이다.
새벽, 은지는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났다. 거실에 나가보니 어머니가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은지의 교복 소매를 접어 바느질하고 있었다. - 엄마, 뭐 해요? 은지가 묻자 어머니는 놀라며 - 아, 소매가 너무 길어서. 이렇게 접어 놓으면 나중에 풀기도 쉽잖아.
어머니의 손끝에 반짇고리가 있었다. 바늘에 실을 꿰어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박음질하고 있었다. 은지는 어머니 옆에 앉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거칠지만 따뜻한 손. - 엄마, 고마워요. 어머니는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우리 은지, 중학생 되는구나.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겨울 새벽의 차가운 빛이 반지하 창문으로 들어왔다. 은지는 그 빛을 보며 생각했다. 비록 큰 교복이지만, 언젠가는 딱 맞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엄마의 바느질처럼, 한 땀 한 땀 시간을 견뎌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