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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by 부소유

시간이 흘러 수능을 앞둔 시점이었다. 은지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펼쳐진 문제집에는 빨간 펜으로 가득한 체크 표시가 있었다. 고3이 된 후로 하루 네 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일주일 전, 학교에서 원서 접수 상담이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 은지야, 너는 어느 대학 지원할 거니? 하고 물었다. 은지는 - 시립대 생각하고 있어요. 등록금이 싸니까요, 라고 답했다. 집에 돌아와 은지는 대학 등록금을 검색했다. 학기당 400만 원이 넘었다. 1년이면 800만 원. 4년이면 3200만 원. 시립대는 그 절반 정도였다. 사실 그마저도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은지는 장학금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성적 장학금, 생활비 지원, 근로 장학금. 가능한 모든 것을 메모했다.


저녁, 아버지가 은지를 불렀다. - 은지야, 아빠가 교육보험 들어놨어. 만기되면 500만 원 나와. 대학 등록금에 보태.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은지는 알았다. 그 보험료를 내기 위해 아버지가 얼마나 아꼈는지. 담배도 끊고, 점심도 거르면서.


그날 밤, 고모가 전화를 했다. 어머니가 받았다. - 언니, 준호 수능 끝나면 미국 어학연수 보내려고요. 6개월에 3천만 원이래요. 비싸죠? 그래도 투자라고 생각해야죠. 어머니는 - 그렇네요, 라고만 답했다. 전화를 끊고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은지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 엄마, 나 대학교 가면 장학금 받을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은지를 꼭 안으며 - 우리 은지 고생 많았어, 라고 속삭였다.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수능 3일 전, 할머니가 왔다. 고모와 함께였다. 할머니는 준호 이야기만 했다. - 준호가 모의고사에서 전국 100등 안에 들었대. 서울대 경영학과 갈 거래. 그리고는 은지를 보며 - 너는 어디 갈 거니? 하고 물었다. 은지가 -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라고 답하자 할머니는 - 여자는 교대나 가는 게 좋아. 시집가기도 좋고, 라고 말했다. 고모가 - 은지도 공부 잘한다던데? 하고 물었지만 관심은 없어 보였다. 곧바로 - 준호는 과외 선생님이 서울대 출신이에요. 시간당 10만 원씩 주는데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라고 자랑을 이어갔다. 은지는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수능 전날 밤, 은지는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별이 보였다. 반지하에서도 고개를 들면 보이는 작은 하늘. 은지는 그 별을 보며 기도했다. 종교는 없었지만, 간절함은 있었다. 제발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이 집을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새벽 한 시, 민수가 은지 방으로 들어왔다. 열 살이 된 동생은 제법 의젓해졌다. - 누나, 이거. 민수는 초콜릿을 내밀었다. - 힘내라고. 누나는 꼭 좋은 대학 갈 거야. 은지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고마워. 누나가 좋은 대학 가서 너도 좋은 대학 보낼게.


수능 당일 아침, 온 가족이 일찍 일어났다. 어머니는 미역국 대신 든든한 아침을 차렸다. 아버지는 - 은지야, 긴장하지 말고. 네 실력이면 충분해, 라고 격려했다. 은지는 교복을 입었다. 이제는 교복이 몸에 맞았다. 아니, 작아졌다. 학교 정문에는 후배들이 응원을 나와 있었다. 은지는 그들의 환호 속을 지나갔다. 시험장에 들어서니 긴장이 밀려왔다. 손이 떨렸다. 심호흡을 했다. 이 시험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은지는 탈진한 듯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 어땠니? 하고 묻자 은지는 - 그냥 그래요, 라고 답했다. 그날 저녁, 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 야, 너 수능 어땠어? 나는 대박이었어. 서울대 확실할 것 같아. 은지는 - 잘했네, 축하해, 라고 답했다. 준호가 - 너는? 어디 지원할 거야? 하고 묻자 은지는 - 아직 모르겠어, 라고 답했다. 준호는 - 너는 지방대 가겠네,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성적표가 나온 날, 은지는 놀랐다. 예상보다 훨씬 잘 나왔다. 서울 소재 주요 대학도 충분히 가능한 점수였다. 담임선생님이 - 은지야, 축하한다. 이 점수면 연세대나 고려대도 도전해볼 만해, 라고 말했다. 하지만 은지는 고개를 저었다. - 시립대 가야해요. 장학금도 있고요.


원서 접수 마지막 날, 은지는 시립대 경제학과에 지원했다. 등록금이 가장 저렴하고 장학금 혜택이 많은 곳이었다. 어머니가 - 정말 괜찮니? 더 좋은 대학 갈 수 있는데, 하고 물었지만 은지는 - 여기가 좋아요. 집에서도 가깝고요, 라고 답했다.


합격자 발표일, 은지는 떨리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켰다. 합격이었다. 그것도 수석 합격. 전액 장학금 대상자였다. 은지는 처음으로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어머니도 울었다. 아버지는 은지를 꼭 안으며 -자랑스럽다, 우리 딸, 이라고 말했다.


준호는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온 친척이 축하 전화를 했다. 할머니는 준호에게 백만 원을 입학 축하금으로 주었다. 은지의 합격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그래? 잘했네, 라고만 말했다. 축하금은 없었다. 하지만 은지는 상관없었다. 이제 시작이니까.


오늘 나는 내 힘으로 대학에 합격했다. 비싼 학원도, 과외도 없이. 반지하에서 공부하며. 이것이 내 첫 번째 승리다. 앞으로 더 많은 승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반지하를 벗어날 것이다. 우리 가족 모두를 데리고.


새벽, 은지는 창밖을 봤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 눈이었다. 창문에도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은지는 손을 뻗어 창문에 닿았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새하얀 눈. 모든 것을 덮고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눈. 대학 입학을 앞둔 봄, 은지는 처음으로 희망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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