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가을, 대학 2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은지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 은지야, 준호가 사고를 쳤대. 고모가 펑펑 울면서 전화했어.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준호가 학교에서 집단 컨닝에 연루되었다는 것이었다. 1학년 중간고사에서 같은 과 학생들과 조직적으로 부정행위를 했다가 적발되었다. 교수가 시험지의 답안이 이상할 정도로 일치하는 것을 발견하고 조사에 들어갔고, CCTV 확인 결과 학생들이 수신호를 주고받은 것이 드러났다. 은지는 놀랐다. 준호는 늘 자신이 똑똑하다고 자랑하던 아이였다. 공부를 잘한다고, 서울대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했던 아이가 왜 컨닝을 했을까. 은지는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감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고모와 할머니가 와 있었다. 고모는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울다가 지친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안절부절못하며 - 우리 준호가 왜 그랬을까, 누가 꼬드긴 거야, 분명히,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묵묵히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차를 내오고 있었다. 고모가 - 언니, 어떡하면 좋아요? 준호가 정학 처분을 받을 수도 있대요. 서울대에서 정학이라니, 하며 또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가 - 그런 일로 정학까지 시키면 어떡해. 애들이 실수할 수도 있지, 하며 학교를 원망했다. 누구도 준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은지가 조심스럽게 - 준호는 뭐라고 해요? 하고 묻자 고모가 - 계속 친구들이 시킨 거라고만 해. 자기는 하기 싫었는데 분위기에 휩쓸렸대. 은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분위기에 휩쓸렸다. 그동안 모든 것을 쉽게 얻었던 준호에게 정당한 노력이란 무엇이었을까.
며칠 후, 준호의 처분이 결정되었다. 한 학기 정학이었다. 고모부가 학교에 찾아가 탄원서를 냈지만 소용없었다. 서울대는 엄격했다. 준호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매일 고모네를 찾아가 준호를 달랬지만, 준호는 할머니도 만나지 않았다. 그 시기 은지는 중간고사에서 전 과목 A+를 받았다. 도서관에서 새벽까지 공부한 결과였다. 교수님이 - 김은지 학생, 정말 훌륭한 답안이었어요, 하고 칭찬했다. 하지만 은지는 이 소식을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다. 준호 사건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고 싶지 않았다.
겨울이 되자 준호는 더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다. 밤마다 클럽에 가고, 술을 마시고, 아침에 들어왔다. 고모가 - 준호야,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려, 하고 말해도 준호는 - 나한테 신경 끄세요, 하며 반항했다. 준호는 처음으로 실패를 경험하고 있었고,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할머니가 은지네 집에 와서 울었다. - 우리 준호가 왜 이렇게 됐을까. 그렇게 착한 아이였는데. 어머니가 -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예요, 하고 위로했지만 할머니는 계속 울기만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 은지야, 네가 준호 좀 만나줄래? 같은 또래니까 말이 통할 거야, 하고 부탁했다. 은지는 당황했다. 평소에는 자신을 무시하던 할머니가 이제 와서 부탁을 하다니.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 한번 만나볼게요. 할머니의 얼굴이 밝아졌다. - 고맙다, 은지야. 역시 우리 은지가 착해. 처음으로 할머니가 은지를 ‘우리 은지’라고 불렀다.
주말에 은지는 준호를 만나러 갔다. 고모네 아파트였다. 13층. 여전히 넓고 화려했다. 준호는 자기 방에 있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니 준호는 침대에 누워 게임을 하고 있었다. - 뭐 하러 왔어? 준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은지는 - 그냥 걱정돼서, 하고 답했다. 준호가 - 걱정? 네가 날 걱정해? 웃기지 마. 너야말로 신났겠지. 망가지는 꼴 보니까. 은지는 조용히 - 아니야, 정말 걱정돼서 온 거야, 하고 말했다. 준호는 게임을 멈추고 은지를 봤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운 것 같았다.
- 나도 모르겠어. 왜 그랬는지. 준호가 처음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 다들 하니까 나도 했어. 안 하면 바보 같았어. 그동안 그렇게 살았거든.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남들보다 더 좋은 거 갖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 은지는 준호 옆에 앉았다. - 실수할 수 있어. 중요한 건 다시 시작하는 거야. 준호가 비웃었다. - 다시 시작? 난 이미 낙인찍혔어. 서울대 컨닝남. 그게 내 타이틀이야. 은지는 -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잊어. 네가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해. 준호가 갑자기 물었다. - 너는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살아? 반지하에 살면서도 불평 한번 안 하고. 은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너처럼 쉬운 길이 없었어. 그냥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어. 그 말에 준호는 침묵했다. 한참 후에 - 부럽다, 하고 중얼거렸다. 은지가 놀라 - 뭐가? 하고 묻자 준호는 - 네가 가진 그 힘. 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는 힘. 나는 그게 없어. 늘 할머니가, 엄마가, 돈이 나를 받쳐줬어. 그것들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
은지는 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어. 네 힘으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면 돼.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진짜 표정을 보였다. 불안과 두려움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이었다.
고모가 방으로 들어왔다. - 은지 왔구나. 고마워. 준호야, 은지가 와줬잖아. 인사해. 준호가 어색하게 - 고마워, 하고 말했다. 고모가 - 은지야, 밥 먹고 가라, 하고 권했지만 은지는 - 괜찮아요, 집에 가볼게요, 하고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은지는 준호를 생각했다. 평생 온실 속에서 자란 아이. 처음 마주한 실패 앞에서 무너진 아이. 은지는 준호가 불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온실 속 화초는 바람을 견디지 못한다. 그날 밤, 할머니가 전화를 했다. 어머니가 받고는 은지에게 바꿔주었다. - 은지야, 고마워. 준호가 네 덕분에 마음을 좀 열었대. 할머니 목소리에 눈물이 섞여 있었다.
오늘 준호를 만났다. 무너진 준호를 봤다. 이상하게도 통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타까웠다. 우리는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같은 고민을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 다만 준호는 이제 시작이고, 나는 평생 해온 고민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준호는 결국 복학했다. 한 학기를 쉬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예전의 오만함은 사라졌다. 대신 조심스러움이 생겼다. 가끔 은지에게 전화해서 공부 방법을 물어보기도 했다. 은지는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그해 겨울, 준호는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학점을 받았다. B+였지만 스스로 만족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준호를 더 사랑했지만, 이제는 은지도 가끔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