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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by 부소유

겨울방학이었다. 은지는 방 청소를 하다가 책상 서랍 깊은 곳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누렇게 변색된 편지 봉투였다. 받는 사람 란에 ‘영수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 이름이었다. 보낸 사람은 할머니였다. 우표에 찍힌 소인을 보니 1975년이었다. 아버지가 열일곱 살 때. 은지는 망설였다. 남의 편지를 읽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봉투는 이미 뜯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편지를 꺼냈다. 갈색으로 변한 편지지에 할머니의 글씨가 빼곡했다. 젊은 시절 할머니의 글씨는 지금보다 또렷했다.


‘영수야, 공부는 잘하고 있니? 엄마는 요즘 공장에서 야근이 많아서 힘들구나. 하지만 네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면 이 고생도 다 보람이 될 거야. 영철이는 또 말썽을 피웠다. 학교에서 싸움을 했대. 너는 형이니까 동생 좀 잘 타일러 줘라. 용돈은 다음 달에 보내줄게. 이번 달은 영철이 학원비 내느라 빠듯하구나.’


은지는 편지를 다시 읽었다. 스물네 해 전에도 할머니는 삼촌 편을 들었구나. 아버지는 용돈도 못 받고 동생 뒷바라지를 해야 했구나.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서랍을 더 뒤지니 편지가 더 나왔다. 열 통 정도였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아버지가 군대에 가기 전까지의 편지들이었다. 은지는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었다. 영철이 걱정, 돈이 없다는 하소연, 그리고 아버지에게 더 잘하라는 당부. 그중 한 통이 눈에 띄었다. 1978년 편지였다. ‘영수야, 네가 대학을 포기한다니 엄마는 정말 속상하구나. 하지만 집안 형편을 생각해준 네가 고맙기도 해. 영철이는 꼭 대학을 가야 한다. 걔는 머리가 좋으니까. 너는 형이니까 이해해 주겠지?’


은지는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대학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것도 삼촌을 위해서. 아버지는 늘 고졸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은지는 아버지가 공부를 못해서 대학을 못 간 줄 알았다. 하지만 포기한 것이었다. 가족을 위해, 아니 삼촌을 위해.


마지막 편지는 1980년이었다. ‘영수야, 군대 잘 다녀오너라. 영철이가 대학 합격했다. 서울 중심가 대학이야. 엄마가 정말 자랑스럽다. 네가 번 돈으로 영철이 등록금 낼 수 있어서 고마워. 형 노릇 제대로 하는구나.’


형 노릇. 은지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아버지에게 형이란 무엇이었을까. 희생? 책임? 아니면 굴레? 은지는 편지들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아버지가 숨겨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날 저녁, 은지는 아버지를 유심히 봤다. 묵묵히 밥을 먹는 아버지.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마흔한 살. 아직 젊은 나이인데 벌써 늙어 보였다. 은지가 - 아빠, 아빠도 대학 가고 싶었어요? 하고 물었다. 아버지가 놀란 듯 은지를 봤다. - 왜 갑자기? 은지가 - 그냥요. 궁금해서.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다가 - 글쎄, 가고 싶었는지 아닌지도 기억 안 나네, 하고 답했다. 그리고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어머니가 - 은지야, 밥 먹어. 식겠다, 하고 말했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밤, 은지는 일기를 쓰려다가 멈췄다. 대신 할머니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하지만 첫 문장부터 막혔다. ‘할머니께’라고 쓰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무엇을 써야 할까. 왜 저를 사랑하지 않으세요? 왜 아빠보다 삼촌을 더 아끼세요? 왜 준호만 예뻐하세요? 결국 은지는 이렇게 썼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은지예요. 요즘 건강하신가요? 저는 이제 중학생이 됩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할머니도 건강 조심하세요.’ 형식적인 안부 인사뿐이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쓰지 못했다.


편지를 접으려다가 은지는 한 줄을 더 썼다. ‘할머니, 저도 할머니의 손녀예요.’ 그리고 급하게 지웠다. 연필 자국이 진하게 남았다. 다시 깨끗한 종이에 편지를 옮겨 적었다. 이번에는 그 문장 없이.


다음 날, 할머니가 왔다. 오랜만이었다. 고모가 해외여행을 가서 할머니를 우리 집에 며칠 맡긴다고 했다. 할머니는 들어오자마자 - 춥다, 여기는 왜 이렇게 추워? 하고 불평했다. 반지하는 겨울에 특히 추웠다. 보일러를 틀어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전기장판을 안방에 깔아드렸다. 할머니는 - 영희네는 바닥이 뜨끈뜨끈한데, 하고 중얼거렸다. 은지가 할머니께 차를 가져다드리자 할머니는 은지를 물끄러미 봤다. - 너 많이 컸구나. 그리고는 - 준호보다는 작네, 하고 덧붙였다.


저녁 식사 때 할머니는 반찬 투정을 했다. - 이게 다야? 김치하고 나물뿐이네. 어머니가 - 죄송해요, 어머니. 장을 못 봤어요, 하자 할머니는 - 영희네는 매일 고기 반찬이 있던데, 하고 말했다. 아버지가 - 어머니, 그냥 드세요, 하자 할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밥을 먹었다.


밤에 할머니는 은지를 불렀다. - 너 공부는 잘하니? 은지가 - 네,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자 할머니는 - 여자애가 공부를 잘해서 뭐하니. 시집이나 잘 가야지.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편지였다. - 이거 영희가 너한테 주래. 준호가 쓴 거야.


은지는 편지를 받아 읽었다. ‘은지에게. 나 강남 중학교 입학했어. 여기 완전 좋아. 수영장도 있고 테니스장도 있어. 너는 어디 중학교 가니? 아무튼 중학교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해. 나는 전교 1등 할 거야. 준호가.’ 자랑뿐인 편지였다.


할머니가 - 준호 글씨 예쁘지? 하고 물었다. 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 준호는 뭐든 잘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그리고는 은지를 보며 - 너도 준호처럼 되도록 노력해라, 하고 말했다.


그날 밤, 은지는 준호의 편지를 찢었다. 조각조각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쓴 할머니께 보낼 편지도 찢었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할머니는 내 편지를 읽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받아도 준호의 편지만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새벽, 은지는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깼다. 할머니의 신음 소리였다. 은지는 안방으로 갔다. 할머니가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 미안해... 미안해... 순희야... 엄마가 미안해... 순희. 죽은 첫째 딸의 이름인 것 같았다. 은지는 할머니를 보며 생각했다. 할머니도 상처가 있구나. 못다 한 사랑이 있구나.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차별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죽은 자를 그리워한다고 산 자를 소홀히 해도 되는 걸까.


아침, 할머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밤의 신음도, 순희라는 이름도. 그저 - 밥 먹자, 배고프다, 하고 말할 뿐이었다. 은지는 할머니의 밥상을 차렸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 할머니, 순희 고모는 어떤 분이었어요? 할머니의 손이 멈췄다. 숟가락을 든 채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은지를 봤다.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은지가 - 그냥 들었어요, 하자 할머니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 예쁜 아이였어. 너처럼... 아니, 너보다 더. 그 말에 은지는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죽은 자와 경쟁해야 하는구나. 이길 수 없는 싸움이구나. 할머니는 계속 말했다. - 그 애가 살았으면... 모든 게 달랐을 거야. 그리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고모가 할머니를 데리러 온 날, 할머니는 은지에게 뭔가를 주었다. 낡은 사진이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사진. 순희 고모였다. - 네가 가져라. 닮았으니까. 은지는 사진을 받았다. 하지만 닮지 않았다. 전혀 닮지 않았다.


할머니가 떠난 후, 은지는 아버지의 편지들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그 옆에 순희 고모의 사진을 놓았다. 죽은 자와 산 자. 과거와 현재. 그리운 것과 있는 것. 은지는 깨달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엇갈려 있다. 할머니는 죽은 딸을 그리워하고, 아버지는 가지지 못한 꿈을 묻어두고, 나는 받지 못한 사랑을 갈구한다.


오늘 할머니의 상처를 봤다. 하지만 상처가 상처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할머니의 편지도, 나의 편지도, 결국 닿지 못한 마음들이다. 우리는 모두 편지를 쓰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다. 각자의 상처에 갇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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