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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by 부소유

8월 중순의 무더운 밤이었다. 은지는 선풍기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학원을 끊은 후로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연필 소리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고요한 집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점점 거칠어지는 노크 소리.


어머니가 문을 열었다. 삼촌이었다. 술 냄새가 현관까지 진동했다. 삼촌은 비틀거리며 들어오다가 신발장에 부딪혔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열쇠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 아이고, 형수님. 형있어요? 삼촌의 혀가 꼬인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 안 계시는데요, 하자 삼촌은 - 그럼 나 좀 재워줘요, 하며 거실로 들어왔다.


은지는 방문을 살짝 열고 내다봤다. 삼촌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셔츠는 구겨져 있었고, 바지 무릎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어디서 넘어진 모양이었다. 삼촌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 물 좀, 하고 말했다. 어머니가 물을 가져다주자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아주 집안이 울릴정도로 강렬한 트림을 했다.


민수가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달래러 가는 사이, 삼촌은 은지를 발견했다. - 우리 은지 공부하나? 착하네, 착해. 삼촌이 비틀거리며 은지 쪽으로 왔다. 은지는 뒷걸음질 쳤다. 삼촌의 입에서 나는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역겨웠다.


삼촌은 은지의 책상을 내려다보며 - 수학이네. 삼촌이 어릴 때는 수학 잘했어. 근데 뭐 하러 공부해? 다 소용없어. 그 말과 함께 삼촌은 웃었다. 공허한 웃음이었다. 은지는 삼촌의 눈에서 뭔가 깨진 것을 보았다. 서른여섯 살 남자의 눈에 있어서는 안 될 포기와 자조.


어머니가 돌아왔다. - 도련님, 이제 가세요. 애들 자야 해요. 하지만 삼촌은 움직이지 않았다. - 형수님, 나 갈 데가 없어요. 진짜로. 어머니의 얼굴이 굳었다. - 또 무슨 일이에요? 삼촌이 머리를 감싸 쥐며 - 다 잃었어요. 다 날렸어.


은지는 숨을 죽였다. 또 도박이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할머니가 돈을 주어 해결했다. 아버지도 월급을 쪼개 도왔다. 하지만 삼촌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더 나빠졌다.


- 얼마예요? 어머니가 차갑게 물었다. 삼촌이 손가락 한 개를 펼쳤다. 백만 원. 어머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 우리가 그런 돈이 어디 있어요? 형 월급이 얼마인지 알아요? 삼촌은 고개를 떨구었다. - 알아요. 미안해요. 근데 정말 급해요. 내일까지 갚아야 해요.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아버지였다. 거실의 분위기를 파악한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 또냐. 그 한 마디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실망, 분노, 체념. 삼촌은 형을 보자 울기 시작했다. - 형, 나 좀 살려줘. 마지막이야. 진짜 마지막이야.


아버지는 삼촌을 바라보다가 -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 하고 말했다. 두 사람이 나가고 어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거칠게 났다. 은지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봤다. 골목 가로등 아래서 아버지와 삼촌이 대화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버지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한 시간쯤 지나 아버지가 혼자 들어왔다. 표정이 어두웠다. 어머니가 - 또 도와주기로 했어요? 하고 묻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 그 돈이 어디 있어요? 우리도 홍수 피해 복구하느라 빚졌는데. 아버지는 - 내가 알아서 할게, 하고 답했다.


은지는 그날 밤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었다. 아버지가 대출을 받기로 했다는 것, 어머니가 반대했지만 아버지가 고집을 부렸다는 것, 할머니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는 것. 은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다음 날 아침, 삼촌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다. - 형, 고마워. 꼭 갚을게. 아버지는 봉투를 건네며 -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하고 말했다. 삼촌은 고개를 숙였다. - 알아. 정말 미안해.


삼촌이 가고 난 후, 집 안 분위기는 무거웠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어머니는 한숨만 쉬었다. 민수도 눈치를 보며 조용히 놀았다. 은지는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백만 원. 그 돈이면 학원을 1년은 다닐 수 있을 텐데.


오후에 할머니가 왔다. 고모가 데려다준 것이다. 할머니는 들어오자마자 - 영철이는? 하고 물었다. 어머니가 - 모르겠어요, 하자 할머니는 - 그 녀석, 또 사고 쳤구나,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 불쌍한 내 새끼, 하고 중얼거렸다.


은지는 그 말에 화가 났다. 불쌍한 건 삼촌이 아니라 아버지 아닌가. 빚을 내서 동생을 도와주는 아버지가 더 불쌍한 것 아닌가. 하지만 할머니는 늘 그랬다. 문제를 일으키는 삼촌을 더 걱정하고, 묵묵히 해결하는 아버지는 당연하게 여겼다.


저녁 무렵, 삼촌이 또 나타났다. 이번에는 술에 취하지 않았지만 불안해 보였다. - 형, 큰일 났어. 그 돈으로도 안 돼. 이자가 더 붙었대. 아버지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 뭐? 어머니가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소리가 정적을 깼다.


할머니가 - 얼마가 더 필요한데? 하고 물었다. 삼촌이 - 백, 하자 할머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봉투를 들고 나왔다. - 여기 오십 있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삼촌은 봉투를 받으며 - 엄마, 고마워, 하고 말했다.


아버지가 - 어머니,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자 할머니는 - 네가 뭘 알아? 동생 하나 제대로 못 챙기면서, 하고 말했다. 그 말에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은지는 할머니를 노려봤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지만 할머니는 시선을 피했다.


그날 밤, 삼촌은 집을 나갔다. 어디로 가는지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 이번엔 정말 끝이다, 하고 말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삼촌은 또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삼촌이 또 돌아왔다. 그리고 또 돈을 가져갔다. 할머니는 삼촌만 감싼다. 아버지는 또 희생했다. 이게 우리 가족이다. 누군가는 계속 빼앗고, 누군가는 계속 빼앗긴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새벽 두 시, 은지는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 거실을 지나는데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빨간 불빛만 명멸했다. 은지는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구부러진 어깨가 너무 작아 보였다.


그때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왜 나만 형이어야 했을까. 은지는 그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장남이라는 굴레를. 책임이라는 짐을.


은지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다. 창밖을 보니 별이 없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 또 비가 올 것 같았다. 은지는 생각했다. 이 반지하에는 물만 차는 게 아니다. 상처도 차고, 빚도 차고, 원망도 찬다. 그리고 그것들은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아침이 되자 삼촌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원도에서 일자리를 구했다고 했다. 위험하지만 돈을 많이 준다고 했다. 아버지는 - 조심해, 하고만 말했다. 전화를 끊고 아버지는 한참을 전화기를 바라봤다.


은지는 알았다. 삼촌은 또 돌아올 것이다. 실패하고, 다치고, 빈손으로. 그리고 아버지는 또 받아줄 것이다. 그것이 이 집의 운명이었다. 탕자는 계속 돌아오고, 장남은 계속 기다린다. 그 사이에서 나머지 가족들은 조금씩 마모되어 간다. 물에 젖은 벽지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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