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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

by 부소유

홍수가 지나간 지 사흘째, 집 안에는 여전히 습기가 가득했다. 벽지 아래로 검은 얼룩이 번지기 시작했고, 마룻바닥은 들뜬 곳이 여기저기 생겼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은지는 그 소리가 집이 앓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침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지만 반지하의 공기는 좀처럼 순환되지 않았다. 할머니가 고모네로 간 후 안방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금기의 공간처럼. 하지만 은지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새벽마다 그 방 문을 열고 들여다본다는 것을. 한숨을 쉬며 문을 닫는 소리가 은지의 얕은 잠을 깨웠다.


어머니는 더 바빠졌다. 파출부 일을 하루에 두 집씩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 여섯 시에 나가서 저녁 여덟 시에 돌아왔다. 물난리로 못 쓰게 된 가전제품들을 새로 사야 했기 때문이었다. 텔레비전, 선풍기, 전기밥솥. 필수품들이었지만 한꺼번에 사기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은지는 학원을 끊었다. - 엄마, 나 학원 안 가도 돼, 혼자 공부할게. 어머니는 잠시 은지를 바라보다가 - 그래, 하고만 답했다. 그 짧은 대답 속에 담긴 무게를 은지는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


저녁 식탁이 조용해졌다. 할머니가 있을 때는 늘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틀어놓고 뉴스를 봤는데, 이제는 숟가락 소리만 들렸다. 민수도 말이 없어졌다. 여섯 살짜리가 분위기를 읽는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안쓰러웠다. 할머니의 반찬통들이 아직 부엌 한구석에 쌓여 있었다. 고춧가루 묻은 플라스틱 통, 된장 담은 유리병, 젓갈 통. 어머니는 그것들을 치우지 않았다. 마치 할머니가 곧 돌아올 것처럼. 하지만 은지는 알았다.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일요일 오후, 고모가 왔다. 혼자였다. - 언니, 김치 좀 담가줘요. 우리 엄마가 언니 김치 먹고 싶다고 하시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배추를 꺼냈다. 은지는 마늘 까는 것을 도왔다. 고모는 부엌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 우리 집은 계단이 많아서 엄마가 다니기 불편해하셔, 하고 말했다. 계단이 많아서 불편하다. 은지는 그 말을 곱씹었다. 13층 아파트가 불편하다니. 그럼 반지하는 뭐란 말인가. 습기 찬 이 집은 할머니의 관절염에 최악이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20년을 여기서 살았다. 불평 한마디 없이. 아니, 불평은 했지만 떠나지는 않았다.


고모가 돌아간 후 어머니는 김치를 담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계단이 많아서 불편하다고. 그럼 우리 집은 뭐냐고. 물이 차서 편한가. 은지는 처음 듣는 어머니의 신랄한 어조에 놀랐다. 어머니는 늘 고모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예예 대답하기만 했는데. 그날 밤, 아버지가 늦게 들어왔다.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삼계탕 재료였다. - 내일 어머니 모시고 와서 같이 먹자. 어머니가 - 고모네서 잘 계신다는데요, 하자 아버지는 - 그래도 우리 집에 계셔야지, 하고 답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정말로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할머니는 깨끗한 한복을 입고 있었다. 고모가 새로 사준 것이 분명했다. 반지하 문턱을 넘어서는 할머니의 표정이 묘했다. 안도감인지 실망감인지 알 수 없는 표정. 할머니는 안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은지가 슬쩍 들여다보니 장롱을 열어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돈이 든 봉투를 세고 있었다. 홍수에도 무사했나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은지는 마음이 서늘해졌다. 할머니가 걱정한 것은 가족이 아니라 돈이었구나.


점심상이 차려졌다. 삼계탕이 끓는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졌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할머니는 - 영희네는 매일 외식하더라, 하고 말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 아파트는 좋더라고. 공기도 좋고. 침묵이 이어졌다. 민수가 - 할머니, 우리 집에 물 들어왔어요, 하고 말했다. 할머니는 - 그래, 알아, 하고 짧게 답했다. 그뿐이었다. 괜찮았냐는 말도, 고생했다는 말도 없었다. 대신 - 영희가 나 데리고 백화점 갔는데, 거기 얼마나 좋은지 몰라, 하고 말했다.


어머니가 숟가락을 놓았다. 천천히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물 마시러 간다고 했지만 은지는 보았다. 어머니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묵묵히 닭고기를 찢어 할머니 앞에 놓았다. 식사가 끝나고 할머니는 - 나 영희네 가야 해, 하고 말했다. 아버지가 - 여기 계시지 그러세요, 하자 할머니는 - 영희가 기다려, 하고 답했다. 그게 전부였다. 짐도 싸지 않았다. 애초에 가져온 것도 없었다.


할머니가 떠나고 집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떨어뜨렸다. 산산조각이 났다. 은지가 치우려 하자 어머니가 - 하지 마, 내가 할게, 하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참 동안 깨진 그릇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녁, 은지는 안방에 들어가 봤다. 할머니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파스 냄새와 한약 냄새가 섞인 특유의 냄새. 화장대 위에는 할머니가 쓰던 빗이 놓여 있었다. 흰 머리카락 몇 가닥이 엉켜 있었다. 은지는 그 빗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고모의 차가 보였다. 할머니를 태우러 온 것이다. 고모는 경적을 울렸다. 할머니가 나갔다. 은지는 창문 너머로 지켜봤다. 할머니가 차에 타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원래 그 차의 주인인 것처럼. 차가 떠나고 은지는 깨달았다. 할머니는 이미 이 집을 떠난 것이다. 몸만 여기 있었을 뿐, 마음은 진작에 13층으로 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할머니의 마음은 이곳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 은지는 꿈을 꿨다. 물이 다시 차오르는 꿈. 하지만 이번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물 위를 걸어서 13층으로 올라갔다. 은지는 할머니를 부르며 따라가려 했지만 발이 물속에 빠져 움직일 수 없었다. 할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잠에서 깬 은지는 베개가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었다. 새벽 세 시.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도 들렸다. 민수의 고른 숨소리도. 모두가 제자리에 있었다. 할머니만 빼고.


은지는 일어나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갔다. 싱크대 위에 고모가 두고 간 김치통이 있었다. 어머니가 담근 김치를 담아갈 통. 은지는 그 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김치를 담가주고, 그들은 그것을 가져간다. 우리는 반지하에서 물을 퍼내고, 그들은 13층에서 구경한다. 이것이 우리의 관계다. 하지만 은지는 또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할머니는 할머니고, 고모는 고모다. 가족이다. 가족은 미워하면 안 된다.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까. 왜 이렇게 서운한 걸까.


창밖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할머니 없는 하루. 하지만 동시에 할머니의 부재가 더 크게 느껴지는 하루. 빈자리가 있는 자리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이상한 역설. 은지는 물컵을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훗날 은지는 이 시기를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할머니가 떠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시기. 그리고 없는 것을 있다고 믿으며 살아온 시간들의 무게를 처음으로 실감한 시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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