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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

by 부소유

물이 문턱을 넘어오던 순간, 은지는 자신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는 검은 물결이 마룻바닥의 장판을 적시고, 이불 밑으로 스며들고, 텔레비전 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재난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1998년의 어느 여름 새벽. 창밖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빗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어머니가 먼저 일어났다. 잠결에 들리는 이상한 소리 - 물이 콸콸 쏟아지는 소리가 아니라 찰박찰박 무언가가 넘실거리는 소리 - 에 눈을 뜬 어머니는 맨발로 마루에 내려서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발목까지 차오른 찬물이 살을 에는 듯했다. 은지도 동생 민수도 그 비명에 잠이 깼다. 할머니는 안방에서 - 물이야, 물! 하고 소리쳤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반지하의 숙명이었다. 경사진 골목 끝, 지대가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이 다세대 빌라는 비만 많이 오면 물난리를 겪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서울 전역에 시간당 100밀리가 넘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하수구는 이미 한계를 넘어 역류하기 시작했다. 반지하 창문으로 보이는 것은 평소의 사람 종아리가 아니라 검은 물결뿐이었다.


어머니는 젖은 잠옷 차림으로 세숫대야를 들었다. 은지도 양동이를 찾았다. 민수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지만 아무도 달래줄 여유가 없었다. 할머니는 안방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 영수는 어디 갔어, 영수는! 하고 아들을 찾는 목소리만 높았다. 아버지는 새벽 두 시에 아파트 단지 지하 주차장에 물이 찼다는 연락을 받고 나간 후였다. 관리소장의 숙명이었다. 남의 집 물을 빼러 간 사이 자기 집이 물에 잠기고 있었다.


은지는 무릎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 올렸다. 한 바가지 퍼내는 사이 두 바가지가 들어왔다. 손이 얼얼해지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어머니는 이미 포기한 듯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물을 퍼내기를 반복했다. 그 표정에는 분노와 체념과 비탄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물속에 떠다니는 것들이 있었다. 아끼던 밥상보, 민수의 크레파스, 은지의 일기장, 어제 사온 두루마리 화장지, 플라스틱 국자, 할머니의 혈압약 봉지. 삶의 흔적들이 검은 물 위를 부유했다. 텔레비전은 이미 침수되어 전원이 나갔고, 냉장고는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어머니가 급하게 쌀통을 들어 올려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이 이 순간 구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은지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할머니는 도와주지 않을까. 안방 문 너머로 할머니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칠십 노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생각하면서도, 은지는 서운함을 느꼈다. 평소 같으면 어른 앞에서 그게 무슨 생각이냐고 자신을 꾸짖었겠지만, 물속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원망이 솟구쳤다.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물도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집 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젖은 이불들을 마당으로 끌어냈다. 은지는 걸레로 마룻바닥을 닦았다. 민수는 울다 지쳐 소파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온 것은 아침 여덟 시였다. 진흙이 잔뜩 묻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집 안을 둘러본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물에 젖은 가재도구들을 밖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 당신 있는 아파트는 괜찮아요? 하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 침수로 차 서른 대가 물에 잠겼다는 얘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가 받았다. 고모였다. - 언니, 거기 괜찮아요? 뉴스 보니까 난리던데. 우리 엄마는 어때요? 어머니가 - 물난리 났어요, 집이 다 잠겼어요, 하고 말하자 고모가 - 어머, 그럼 우리 엄마 여기로 모시고 올게요, 하고 말했다. 어머니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 그러세요, 하고 대답했다. 할머니가 안방에서 나온 것은 고모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물에 젖은 한복 차림이었지만 태연한 얼굴이었다. - 영희가 온다니 좋네, 하고 말하며 거울을 보고 머리를 매만졌다. 은지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 열두 살이었지만, 어떤 것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선명하게 각인되는 법이었다.


고모는 한 시간 후에 왔다. 깨끗한 옷차림에 화장까지 한 모습이었다. - 어머나, 어머나, 하면서 집 안을 둘러보던 고모는 할머니를 부축했다. - 엄마, 우리 집 가요. 당분간 거기 계세요. 할머니는 순순히 따라나섰다. 민수가 잠에서 깨어 울음을 터뜨렸지만 할머니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고모의 자동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은지는 처음으로 고모가 사는 13층과 반지하의 차이를 실감했다. 13층에는 물이 차지 않는다. 13층에서는 비가 와도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13층 사람들은 반지하 사람들의 고통을 뉴스로만 접한다. 그리고 13층은 할머니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다. 어머니가 은지 옆에 서서 - 괜찮아, 우리끼리도 할 수 있어, 하고 말했다. 하지만 은지는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떨림을 감지했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자기 확인이었다. 어머니도 상처받았다. 다만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오후가 되자 해가 났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은 하늘이었다. 마치 새벽의 폭우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마당에 널어놓은 이불들에서 김이 올라왔다. 곰팡이 냄새가 났다. 은지는 그 냄새가 가난의 냄새라고 생각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냄새.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나와 피해 상황을 확인했다. 다들 반지하에 살았기에 비슷한 처지였다. 서로 위로하고 한탄했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도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모두가 피해자였다.


삼촌이 나타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 형수님, 우리 엄마는요? 하고 물었다. 어머니가 - 고모네 가셨어요, 하고 대답하자 삼촌은 -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 형님은요?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대답 대신 삼촌에게 걸레를 던졌다. - 닦아, 말만 하지 말고.


1998년 여름의 어느 날, 우리 집에 물이 들어왔다. 할머니는 고모네로 갔다. 나는 처음으로 할머니가 밉다. 아니, 미운 게 아니라 서운하다. 아니, 서운한 게 아니라... 은지는 적확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열두 살의 어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창밖으로 별이 보였다. 반지하에서도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보인다. 좁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지만, 그래도 하늘은 하늘이었다. 은지는 그 별을 보며 생각했다. 언젠가 이 반지하를 벗어날 것이다. 언젠가 13층보다 더 높은 곳에 살 것이다. 그때 할머니가 자신을 찾아온다면 어떻게 할까. 은지는 그 상상을 하다가 잠들었다. 하지만 은지는 모른다. 그것은 높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13층이든 반지하든, 차별의 상처는 높이와 상관없이 깊이 패인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상처는 물처럼, 아래로 아래로만 흐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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