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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

by 부소유

홍수가 지나간 지 일주일째, 은지는 집 안 구석구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나가고, 아버지는 아파트 수해 복구로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민수는 유치원에 갔다. 혼자 남은 은지는 여름방학 숙제를 핑계로 집 정리를 미뤄왔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곰팡이 냄새가 점점 심해졌기 때문이다.


다용도실로 쓰던 작은 방이 가장 피해가 심했다. 물이 가장 깊이 찼던 곳이었다. 은지는 마스크를 쓰고 들어갔다. 박스들이 물에 불어 찌그러져 있었다. 하나씩 열어보니 대부분 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오래된 옷가지, 녹슨 공구들, 쓰지 않는 그릇들. 그런데 맨 아래 박스에서 뭔가 다른 것이 나왔다.


앨범이었다. 가족 앨범. 검은색 가죽 표지는 물에 젖어 쭈글쭈글했지만, 안의 사진들은 비닐 코팅이 되어 있어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은지는 앨범을 들고 마루로 나왔다. 햇빛이 드는 곳에 앉아 한 장 한 장 넘겨보기 시작했다.


첫 장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사진이 있었다. 1984년 봄. 아버지는 까만 양복을 입고 있었고, 어머니는 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할머니가 서 있었다. 할머니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은지는 그제야 알았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어머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구나.


다음 장에는 은지가 태어났을 때 사진이 있었다. 1986년 겨울. 포대기에 싸인 작은 아기. 그런데 이상했다. 할머니가 은지를 안고 있는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어머니가 안고 있거나, 아버지가 안고 있거나, 아니면 그냥 요람에 누워 있는 사진뿐이었다. 반면 그다음 페이지에는 같은 해에 태어난 사촌 준호를 할머니가 안고 있는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할머니가 활짝 웃고 있었다.


은지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배경이 달랐다. 준호의 사진은 넓은 거실이 배경이었다. 샹들리에가 보였다. 은지의 사진은 좁은 방이 배경이었다. 벽지가 낡아 보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아이, 하지만 시작부터 달랐던 것이다.


앨범을 계속 넘기다가 은지는 한 장의 사진에서 멈췄다. 1990년 설날 가족사진이었다. 온 가족이 모여 있었다. 할머니를 중심으로 아버지, 어머니, 삼촌, 고모, 고모부, 그리고 아이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할머니의 손이 준호의 어깨에만 올려져 있었다. 은지는 할머니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네 살의 은지는 그때도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걸까.


사진 아래에 어머니의 글씨로 메모가 적혀 있었다. 1990년 설날, 시어머니 환갑잔치. 은지는 그날을 어렴풋이 기억했다. 할머니가 은지에게 심부름을 시켰던 날. 네 살짜리에게 무거운 쟁반을 들고 어른들께 술을 따르라고 했던 날. 준호는 그냥 놀고 있었는데.


물에 젖은 사진들 중에는 떨어져 나온 것들도 있었다. 비닐에서 벗겨진 사진들이 마룻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은지는 그것들을 하나씩 주웠다. 그중에 특이한 사진이 있었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이었다. 아마 서른쯤 되어 보였다. 할머니 옆에 남자아이 둘이 서 있었다. 아버지와 삼촌이었다. 그런데 뒤에 또 한 명이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 얼굴이 반쯤 잘려 있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어머니였다. 일찍 돌아온 것이다. - 뭐 하니? - 앨범 정리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가까이 와서 사진들을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은지가 들고 있던 사진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 이 사진 어디서 났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 다용도실 박스에서요. 어머니는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을 한참 바라봤다. - 옛날 사진이네.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 엄마, 이 여자아이 누구예요? 은지가 묻자 어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 할머니의 첫째 딸이야.


첫째 딸. 은지는 충격을 받았다. - 고모 말고 또 있었어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 여섯 살에 홍역으로 죽었대. 그래서 할머니가.. 어머니는 말을 멈췄다. 은지는 어머니가 하려던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할머니가 딸을 더 아끼는 거라고.


어머니는 사진을 은지에게 돌려주며 -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특히 할머니한테는. 하고 당부했다. 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할머니에게도 상처가 있었구나. 잃은 딸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구나. 그래서 고모를 그렇게 아꼈구나.


어머니가 부엌으로 가고, 은지는 다시 앨범을 정리했다. 사진들을 연도별로 분류하면서 은지는 패턴을 발견했다.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와 은지 가족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초기 사진에서는 그래도 한 프레임 안에 있었는데, 나중 사진에서는 따로 찍은 것들이 많았다. 마치 한 가족이 아니라 두 가족처럼.


1995년 사진부터는 배경도 달라졌다. 고모네 가족은 해외여행 사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 괌, 하와이. 반면 은지네 가족은 여전히 집이나 동네 공원이 배경이었다. 할머니는 고모네 여행 사진에만 등장했다. 비행기를 타고, 호텔에서 웃고, 바닷가에서 손자 손을 잡고.


은지는 1997년 사진에서 또 하나의 발견을 했다. 준호의 생일파티 사진이었다. 큰 케이크, 많은 선물, 친구들. 화려한 파티였다. 그런데 같은 앨범에 은지의 생일 사진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다. 작은 케이크 앞에서 혼자 촛불을 끄는 사진 한 장. 할머니는 역시 없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올해 초 설날 사진이 있었다. 홍수가 나기 전, 마지막 가족 모임. 은지는 그 사진을 자세히 봤다. 열두 살의 자신이 거기 있었다. 여전히 구석에 서서, 여전히 할머니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하지만 표정이 달랐다. 더 이상 웃지 않고 있었다.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은지는 앨범을 덮었다. 그리고 잘린 얼굴의 사진을 다시 집어 들었다. 죽은 첫째 딸. 이름도 모르는 고모. 할머니는 그 아이를 그리워하며 살아있는 딸을 더 아꼈고, 손녀보다 손자를 더 귀하게 여겼다. 상실의 상처가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은지는 알 수 없었다.


저녁, 아버지가 돌아왔다. 피곤해 보였다. - 사진 정리했네, 하고 말하며 앨범을 들춰봤다. 그러다가 잘린 얼굴 사진을 발견했다. 아버지의 손이 멈췄다. - 누나.. 하고 중얼거렸다. 은지가 - 아빠도 기억나요? 하고 묻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 기억은 안 나. 그냥 엄마가 가끔 우셨어. 누나 이름을 부르면서.


할머니의 비밀을 알았다. 죽은 딸이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살아있는 것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하는 걸까. 상처받은 사람이 또 다른 상처를 만든다. 물에 뜬 가족사진처럼, 우리 가족도 겉으로는 온전해 보이지만 실은 뭔가 잘못되어 있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은지는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하지만 이번엔 소나기였다. 금방 그칠 비. 은지는 잘린 얼굴 사진을 책에 끼워 넣었다. 언젠가 할머니에게 물어볼 수 있을까. 당신의 첫째 딸은 어떤 아이였냐고. 그리고 왜 나는 사랑받지 못했냐고.


하지만 은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 질문은 하지 못할 것이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묻지 못하는 질문들과 대답하지 못하는 침묵들로 이루어진 관계. 물에 뜬 사진처럼, 형체는 있지만 손상된 채로 떠다니는 기억들의 집합체.


새벽, 은지는 잠이 오지 않아 거실로 나왔다. 탁자 위에 앨범이 놓여 있었다. 달빛에 비친 검은 가죽 표지가 물에 젖은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은지는 그것이 우리 가족의 초상 같다고 생각했다. 겉은 번듯해 보여도 속은 젖어 있는. 마르지 않는 습기를 품고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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