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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불안과 자유 사이에서

by 부소유

도서관 강연장에 들어서며 나는 약간의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느꼈다. 카뮈의 <이방인>을 통해 실존철학에 매료되었던 나에게, 사르트르는 늘 궁금하면서도 어딘가 접근하기 어려운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강연을 맡은 불문과 교수님은 사르트르의 생애부터 철학적 핵심 개념까지, 두 시간에 걸쳐 밀도 있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강연은 1905년생 사르트르의 생애 소개로 시작되었다. 그는 철학자이자 소설가, 희곡작가, 평론가, 언론인, 그리고 활동가였다. 교수님은 사르트르를 “밥 먹고 데모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웃음을 자아냈는데, 이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그의 실천적 삶을 압축한 말이었다. 사르트르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의 수재였지만, 모든 제도를 거부한 인물이었다. 박사 학위도, 콜레주드 프랑스 교수직도, 심지어 노벨문학상까지 거절했다. 제도는 권력이고, 권력은 자유를 제한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교수님은 사르트르의 장례식 사진을 보여주며, 볼테르, 빅토르 위고와 함께 프랑스 역사상 단 세 명만이 만들어낸 엄청난 추모 인파를 설명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국장을 하지 않았다. 국장 역시 하나의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관성이 사르트르를 20세기 중반까지 전 세계 지성의 상징으로 만들었지만, 역설적으로 1960년대 이후 그를 급속히 잊히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이데올로기 중심의 사르트르 철학은 낡은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강연의 핵심은 사르트르 철학의 중심 개념들로 이어졌다. 교수님은 칠판에 ‘실존’, ‘자유’, ‘책임’이라는 세 단어를 크게 썼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이 시작되었다. 망치는 무언가를 때리도록 미리 정해진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기능이 없다. 인간은 그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사르트르는 ‘존재’와 ‘실존’을 구분했다. 존재는 그냥 거기 있는 것, 사물처럼 있는 것이다. 반면 실존은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교수님은 이를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로 설명했다. 즉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없이 그저 완결되어 있는 상태다. 동물이나 사물이 그렇다. 대자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바로 이 의식이 인간을 실존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본질 없이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이 무의미함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 교수님은 요즘 대학생들의 무기력을 예로 들었다. “요새 젊은이들이 많이 그래요. 너무너무 불안한 거죠. 자기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고, 미래가 그려지지 않아요.” 이 불안이 바로 실존주의가 말하는 인간의 근본 조건이다.


그렇다면 사르트르는 무엇을 제시하는가? 바로 ‘자유’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유로움이 아니다. 교수님은 강조했다. “자유라는 게 어마어마한 속박이에요. 의미가 없는데 의미를 내가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자유라고 부르는 거예요.” 인간은 자유로울 수밖에 없고, 그 자유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지는 프로젝트로 만든다.


그러나 이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회피하는 것을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이라 불렀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기만 속에서 산다. 안정적인 직장, 좋은 집, 자녀의 성공 같은 부르주아적 안락함 속에서 본질적인 질문을 회피한다. 그런데 여기서 ‘타인’이 등장한다. 희곡 <닫힌 방>의 유명한 구절 “지옥은 타인이다”는 흔히 오해받지만, 실은 타인이 나의 자기기만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의미다. 타인의 시선이 나를 지켜보고 있기에, 나는 계속해서 나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타인은 나를 실존으로 몰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소설 <구토>에 대한 설명은 더욱 흥미로웠다. 주인공 로캉탱은 역사학자로 18세기 귀족의 전기를 쓰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물들을 대하며 구토 증상을 일으킨다. 해변에서 조약돌을 잡았을 때, 그것의 존재 자체가 역겨움을 불러일으킨다. 사물은 그저 거기에 있을 뿐, 아무 의미가 없다. 교수님은 공원 벤치 장면을 특히 강조했다. 로캉탱이 마로니에 나무 뿌리를 보며 존재의 우연성과 과잉을 깨닫는 순간이다. “존재는 어디에나, 무한히, 과도하게,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나 있다.” 이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서 로캉탱은 구토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재즈 음악 ‘Some of These Days’를 들을 때 로캉탱은 다른 경험을 한다.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음반도, 공기의 진동도, 가수의 목소리도 모두 존재했지만, 음악 그 자체는 존재를 넘어선 무언가다. 이 깨달음을 통해 로캉탱은 결심한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책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소설을 쓰겠다고. 교수님은 여기서 AI와 창작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AI가 소설을 쓸 수 있다고 하지만, 단 하나 AI가 갖지 못한 것이 있어요. 바로 고통입니다.” 자신의 무의미성에 대한 반성과 깨달음, 그리고 그것을 사유해내는 고통이 진정한 창작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관계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은 ‘자유 계약 결혼’으로 유명하다. 교수님은 보부아르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는 자유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유롭게 함께 살기를 원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철학을 삶 속에서 실험했다. 사르트르에게 사랑은 “타인의 자유가 실현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며, “한 사람이 사랑하는 자유를 소유하는 순간 사랑은 실패한다”는 것이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조차 하나의 사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끊임없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강연을 들으며 나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차이를 더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카뮈는 진정한 소설가로서 구성과 이야기로 말하지만, 사르트르는 철학자로서 개념으로 말한다. 교수님도 사르트르는 철학을 문학적으로 풀어 쓴 것이기 때문에 문학적으로 소비하기에는 좀 딱딱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실제로 <구토>는 철학 논문을 소설 형식으로 옮긴 듯한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메시지는 여전히 강렬하다. 우리는 모두 의미 없이 던져진 존재다. 그러나 바로 그 무의미함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다. 자유롭기 때문에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하고, 그 의미 창조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교수님이 도서관에 모인 우리를 보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삶의 안락함이 있는데 굳이 도서관에 올 이유는 없거든요. 딴 놈이 떠들는 것을 좀 들어보고 싶어 하는 거잖아요. 그 얘기는 나 아직 답을 못 찾았다는 거예요.”


강연장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부르주아적 안락함 속에서 과거의 추억들을 모으며 사는 것, 그것도 하나의 삶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묻는다. 그것이 진정 자유로운 삶인가?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불안과 고통스러운 질문이야말로 우리를 사물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가 아닌 실존으로 만드는 것 아닌가?


이 강연을 통해 사르트르에 대한 나의 관심은 한층 깊어졌다. 카뮈가 부조리 속에서도 끝까지 버티는 시지프스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면, 사르트르는 그 부조리를 직시하고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라고 외치는 것 같다. 두 철학자 모두 우리에게 쉬운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더 깊이 질문하라고, 더 치열하게 사유하라고, 그리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라고 요구할 뿐이다. 나는 이제 <구토>를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철학 개념들을 이해하고, 그 무거운 자유의 의미를 곱씹으며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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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처럼 살고 싶지만, 현실은 이방인의 뫼르소 처럼 살고 있습니다. 싯다르타 처럼 속세를 벗어나고 싶지만, 현실은 호밀밭의 홀든 콜필드 랍니다. 뭐 그럼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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