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가을,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것이었다. 폐렴이 왔고, 항생제도 듣지 않는다고 했다. 은지는 회사에 반차를 내고 요양원으로 향했다. 지하철 안에서 은지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일주일 전 면회 때 할머니는 은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손을 잡으면 가만히 잡아주었다.
요양원에 도착하니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삼촌, 고모, 준호. 모두가 침울한 표정이었다. 의사가 설명했다. -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길어야 일주일, 짧으면 오늘 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모가 흐느꼈다. 삼촌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표정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할머니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 있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몸무게는 35킬로그램까지 줄어 있었다. 뼈만 남은 몸에 얇은 피부가 겨우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은지는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마른 손. 한때는 준호의 머리를 쓰다듬고, 삼촌에게 돈을 쥐여주던 그 손이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밤이 되자 할머니의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한참 동안 멈추고, 다시 헐떡이듯 숨을 쉬었다. 의사가 - 체인 스토크스 호흡입니다. 임종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예요, 하고 설명했다. 가족들은 할머니 침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침묵이 무거웠다.
새벽 3시, 할머니가 갑자기 눈을 떴다. 맑은 눈이었다. 치매에 걸리기 전의 할머니 눈 같았다. 할머니는 천천히 가족들을 둘러봤다. 아버지를 보고, 삼촌을 보고, 고모를 보고, 그리고 은지를 봤다. 할머니의 입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미안해.’
그리고 할머니는 다시 눈을 감았다. 호흡이 점점 얕아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멈췄다. 새벽 3시 27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80년의 삶이 끝났다. 고모가 울음을 터뜨렸다. - 엄마! 엄마! 삼촌도 무릎을 꿇고 울었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눈을 감겨드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요양원 근처의 작은 곳이었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깨끗했다. 빈소를 차리고 영정 사진을 걸었다. 10년 전 찍은 사진이었다. 할머니가 아직 건강했을 때, 준호 중학교 입학식에서 찍은 사진. 환하게 웃고 있는 할머니.
조문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친척들이었다. 그들은 - 고생 끝났네, 편히 쉬시게 됐네, 하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은지는 그 말이 싫었다. 할머니의 80년이 그저 고생이었을까. 분명 행복한 순간도 있었을 텐데. 사랑한 순간도, 사랑받은 순간도.
준호가 아버지와 함께 상주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준호에게 먼저 인사했다. - 장손이 듬직하네. 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하셨겠어. 준호는 능숙하게 인사를 받았다. 준호는 사실 장손이 아니다. 고모의 아들이 장손 대접을 받는 모습이 이상했다. 은지는 구석에 앉아 있었다. 손녀지만 상주도 아니었다. 그저 유족일 뿐이었다.
둘째 날 밤, 은지는 빈소를 지켰다. 혼자였다. 다른 가족들은 쉬러 갔다. 은지는 할머니 영정을 바라봤다. 사진 속 할머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은지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 할머니, 저 은지예요. 이제야 저를 독점할 수 있네요. 아무도 없으니까.
그때 누군가 들어왔다. 삼촌이었다. 술 냄새가 났다. 삼촌이 영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엄마, 죄송해요. 제가 불효자예요. 엄마 고생시키기만 했어요. 삼촌은 한참을 울었다. 은지는 조용히 지켜봤다. 삼촌도 나름의 슬픔이 있었다. 사랑받았지만 그 사랑을 배신한 죄책감.
셋째 날, 발인이었다. 비가 내렸다. 늦가을의 차가운 비. 운구차를 따라 화장터로 갔다. 화장터는 서울 외곽에 있었다. 공장 같은 건물이었다. 할머니의 관이 화장로로 들어갔다. 철문이 닫혔다. 1시간 30분 후 할머니는 하얀 가루가 되어 나왔다.
유골함을 들고 만월당이라고 불리는 납골당으로 갔다. 5층 건물이었다. 할머니는 3층 중간쯤에 모셔졌다. 작은 공간이었다. 이름표에는 ‘박순자 1928-2008’이라고 적혀 있었다. 80년의 삶이 이 작은 공간에 압축되어 있었다. 은지는 유리문 너머로 유골함을 봤다. 할머니가 정말 저 안에 있는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고모가 말했다. - 이제 정말 끝이네. 어머니도 안 계시고. 아버지가 - 우리가 잘 살아야지, 어머니 보고 계실 텐데, 하고 답했다. 하지만 은지는 알았다. 할머니는 보고 있지 않다. 죽음은 그런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그저 끝일 뿐이다.
그날 밤, 가족들이 모여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했다. 옷가지, 사진, 편지, 통장. 통장에는 3만 원이 남아 있었다. 한때는 장례비로 천만 원을 가지고 있던 할머니. 그 돈은 다 삼촌의 도박 빚을 갚는 데 쓰였다. 이제 남은 것은 3만 원뿐이었다.
사진 중에 은지가 처음 보는 것이 있었다. 젊은 시절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진이었다. 1950년대쯤으로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어린 아이 셋이 있었다. 첫째 딸 순희, 아버지, 삼촌. 행복해 보였다. 그때 할머니는 차별하지 않았을까. 모두를 똑같이 사랑했을까. 고모가 할머니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1970년대 것이었다. 은지가 펼쳐보니 할머니의 글씨가 빼곡했다. ‘오늘도 공장에서 야근. 영수 대학 보내려면 더 벌어야 한다. 영철이는 또 말썽. 하지만 막내라 그런지 더 예쁘다. 순희가 살아 있었으면 열여덟 살. 대학 갔을까.’ 은지는 일기장을 덮었다. 할머니도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이해는 되지만 용서는 되지 않았다. 상처받은 사람이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것. 그것이 우리 가족의 역사였다.
일주일 후, 은지는 납골당에 갔다. 할머니께 인사하려고. 유골함 앞에서 은지는 말했다. - 할머니, 이제 편히 쉬세요. 차별도, 편애도, 아픔도 다 내려놓고. 그리고 속으로 덧붙였다. ‘저는 할머니를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기억할게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은지는 하늘을 봤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11월의 차가운 햇빛. 반지하 창문으로도 가끔 들어오는 그런 빛. 은지는 생각했다. 할머니가 없는 세상. 이제 차별받을 일도, 비교당할 일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허전할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80년의 삶이 끝났다. 나는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다. 할머니도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이었다.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제 할머니의 차별도 역사가 되었다. 잊지 않되, 반복하지 않을 역사.
새벽, 은지는 창밖을 봤다.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이 반지하 창문에도 쌓이고 있었다. 은지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상쾌했다. 할머니가 없는 첫 겨울. 은지는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서글프지만 자유로운, 그런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