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 준비에 한창이었다. 책상 위에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초안으로 가득했다. 형광펜으로 줄 친 신문 스크랩, 면접 예상 질문집, 정장이 걸린 옷걸이. 스물두 살의 은지는 사회라는 새로운 전장을 앞두고 있었다.
첫 면접은 대기업 S사였다. 서류 전형과 필기시험을 통과한 후 받은 면접 통지서를 들고 은지는 떨렸다. 어머니가 - 우리 은지 최고야. 꼭 붙을 거야, 하며 격려했지만 은지는 불안했다. 경쟁자들은 해외 연수, 인턴 경험, 화려한 스펙을 가지고 있을 텐데, 자신에게는 성적표밖에 없었다.
면접 당일, 은지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 동대문 시장에서 5만 원에 산 검은색 정장을 입었다. 어머니가 다림질을 세 번이나 해준 덕분에 구김 하나 없었다. 하지만 옷감이 싸구려라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은지는 거울을 보며 어깨를 폈다. 옷이 아니라 사람을 봐주기를 바라면서.
면접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지원자들이 와 있었다. 대부분 은지보다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는 부모님과 함께 왔다. 벤츠에서 내리는 지원자도 있었다. 은지는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 왔다. 구두 뒤꿈치가 닳아서 걸을 때마다 딸각거렸다.
대기실에서 옆자리 지원자가 말을 걸었다. - 어느 학교세요? 은지가 학교 이름을 말하자 그는 - 아, 시립대요? 거기도 괜찮죠, 하고 말했다. ‘도’라는 한 글자에 담긴 무시를 은지는 느꼈다. 그는 SKY 출신이었다. 아버지가 S사 임원이라고 자연스럽게 언급했다.
면접실에 들어가니 면접관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중앙의 남자가 - 김은지 씨, 집이 어디신가요? 하고 물었다. 은지가 주소를 말하자 면접관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 동네를 아는 것 같았다. - 가정 형편이 어려우신가요? 다음 질문이었다. 은지는 당황했지만 -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돕고 싶습니다, 라고 답했다. - 해외 경험은 있으신가요? - 없습니다. - 인턴 경험은? - 없습니다. - 특별한 활동은? - 도서관에서 멘토링 봉사를 했습니다. 면접관들의 표정이 시큰둥했다. 마지막으로 한 면접관이 - 우리 회사는 글로벌 인재를 원합니다. 준비가 되셨나요? 하고 물었다. 은지는 - 배우겠습니다, 라고 답했지만 이미 결과를 알 것 같았다.
일주일 후, 불합격 통지가 왔다. 예상했지만 아팠다. 어머니가 - 괜찮아, 다른 곳도 많아, 하고 위로했지만 은지는 알았다.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반지하 주소가 이력서에서 얼마나 불리한지를.
두 번째는 중견기업 면접이었다. 이번에는 집 주소를 물었을 때 대략적인 지역만 말했다. 면접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마지막에 인사담당자가 - 혹시 결혼 계획은 있으신가요? 하고 물었다. 은지가 - 당분간 없습니다, 하자 그가 - 여자들은 입사하고 금방 결혼해서 그만두더라고요, 하며 혀를 찼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면접을 볼수록 은지는 지쳤다.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성실함을 아무리 어필해도,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학벌, 집안, 인맥, 경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 없으면 뚫기 어려운 벽들이었다.
벚꽃이 필무렵, 드디어 합격 통지를 받았다. 중소기업이었지만 안정적인 회사였다. 월급은 150만 원. 대기업의 70% 수준이었지만 은지는 기뻤다. 처음으로 정규직이 된 것이다. 어머니는 울며 - 우리 은지 대단해, 하고 말했다. 아버지도 - 자랑스럽다, 하며 은지를 안았다.
첫 출근 날, 은지는 새벽 여섯 시에 집을 나섰다. 회사는 강남에 있었고, 출퇴근 시간은 왕복 3시간이었다. 지하철은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했다. 은지는 구겨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진이 빠져 있었다.
사무실은 작았다. 직원이 20명 정도였다. 은지는 경리부에 배치되었다. 상사는 40대 남자 과장이었다. - 김은지 씨? 대학 어디 나왔어요? 은지가 답하자 그는 - 거기도 나름 괜찮은 학교죠, 하고 말했다. 또 ‘도’였다. 은지는 미소 지으며 -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첫 업무는 단순했다. 전표 정리, 세금계산서 발행, 입출금 관리. 대학에서 배운 경제 이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은지는 성실했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세 번씩 확인했다. 과장이 - 너무 열심히 하지 마. 월급만큼만 일해, 하고 말했지만 은지는 멈추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고 첫 월급을 받았다. 통장에 찍힌 1,486,000원. 4대 보험을 뺀 실수령액이었다. 아직 수습사원이라서 100%는 아니었다. 은지는 통장을 한참 들여다봤다. 자신이 번 첫 돈이었다. 그중 100만 원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가 - 안 받을게. 네 돈이야, 하며 거절했지만 은지는 - 받아주세요. 그동안 고생하신 거 생각하면 이것도 적어요, 하고 우겼다.
회사 생활 두 달째, 회식 자리에서였다. 사장이 - 우리 회사도 SKY 출신이 있어야 하는데,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은지를 보며 - 그래도 우리 은지씨는 성실해서 다행이야. 여자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도 있었다. 커피 심부름, 복사, 청소는 당연히 은지의 몫이었다. 남자 신입사원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과장이 - 여자가 이런 건 잘하잖아, 하며 당연하게 시켰다. 은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학 수석 졸업자가 커피를 타고 있다니.
여름이 되었을 때, 은지는 첫 프로젝트를 맡았다. 신규 거래처 재무 분석이었다. 은지는 밤새 자료를 분석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완벽했다. 하지만 발표는 남자 선배가 했다. 사장이 - 여자가 거래처 만나는 건 좀 그래, 하고 말했다. 은지의 이름은 보고서 끝에 작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은지는 버텼다. 집에 돌아와 울기도 했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웃으며 출근했다. 어머니가 - 힘들지? 하고 물으면 - 괜찮아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답했다. 은지에게 회사의 차별은 익숙한 것이었다.
준호가 전화를 했다. - 나 대기업 S사에 입사했어. 은지가 - 축하해, 하자 준호는 - 근데 너는? 아직 그 중소기업이야? 은지가 - 응, 하자 준호는 - 그 실력이면 더 좋은 데 갈 수 있을 텐데, 하고 말했다. 은지는 - 여기도 좋아, 라고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가을, 은지는 첫 승진 심사를 받았다. 6개월 만의 특진 기회였다. 실적은 최고였다. 하지만 승진은 남자 동기에게 돌아갔다. 인사과장이 - 여자는 어차피 결혼하면 그만둘 거 아니야? 남자를 키워야지,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은지는 화장실에서 주먹을 쥐고 울었다.
첫 직장. 보이지 않는 천장이 있고, 올라갈 수 없는 계단이 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반지하에서도 빛을 찾았듯이, 여기서도 길을 찾을 것이다. 내 실력으로, 내 성실함으로.
연말, 회사 송년회에서 사장이 은지를 칭찬했다. - 은지씨가 정말 열심히 해요. 여자치고는 정말 프로페셔널해. 그 ‘치고는’이라는 말이 칭찬을 모욕으로 만들었지만, 은지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는 ‘치고는’ 없이 인정받을 것이라고.
새해가 밝았다. 은지는 여전히 가장 먼저 출근했다. 반지하에서 강남까지, 매일 같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은지는 알고 있었다.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