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은지가 회사에 입사한 지 1년이 되던 때였다. 새로운 부서장이 왔다. 40대 후반의 김 전무였다. 첫 회의에서 그는 - 이제부터 성과 중심으로 갈 겁니다. 무능한 직원은 가차 없이 내보낼 거예요, 하고 선언했다. 은지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의 시선이 유독 여직원들에게 머물렀기 때문이다. 김 전무는 은지를 특별히 싫어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은지가 회의에서 의견을 내면 - 경험이 부족해서 모르시나 본데, 하며 무시했다. 다른 직원들 앞에서 - 여자가 너무 나서면 보기 안 좋아, 하고 훈계했다. 은지는 참았다. 일 년 차 신입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어느 날, 김 전무는 은지에게 불가능한 과제를 던졌다. 일주일 안에 3년치 재무 데이터를 분석하고 100페이지 보고서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보통 한 달은 걸리는 작업이었다. 은지가 - 시간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하자 김 전무는 - 능력이 부족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한테 시킬까? 하고 위협했다. 은지는 일주일 동안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다. 새벽 3시까지 일하고 사무실 소파에서 쪽잠을 잤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커피로 버텼다. 동료들은 안쓰러워했지만 아무도 돕지 않았다. 김 전무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 은지는 보고서를 완성했다. 97페이지였다. 김 전무는 보고서를 받아들고 - 3페이지 부족하네?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 다시 해. 이번엔 150페이지로. 은지는 믿을 수 없었다. 일주일의 노력이 한순간에 쓰레기가 되었다. 그날 저녁, 은지는 화장실에서 울었다. 변기 칸에 앉아 소리 없이 울었다. 억울했다. 분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가족에게 보내는 돈이 필요했고,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했다. 은지는 눈물을 닦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컴퓨터를 켜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김 전무의 괴롭힘은 점점 심해졌다. 은지가 만든 서류는 항상 문제가 있었다. 폰트가 마음에 안 든다, 여백이 넓다, 제목이 적절하지 않다. 사소한 트집이었지만 매번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했다. 다른 직원들이 같은 형식으로 제출해도 은지의 것만 반려되었다.
회식이 있었다. 김 전무는 은지 옆에 앉았다. 술을 따르라고 했다. 은지가 따르자 - 여자가 따르는 술이 제일 맛있지, 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은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은지가 몸을 피하자 - 왜 그래? 우리 친하게 지내자고, 하며 다시 손을 뻗었다. 은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김 전무가 손목을 잡았다. - 어디 가? 내가 말하는데. 은지는 손목을 뿌리쳤다. 주변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아무도 개입하지 않았다. 모두가 김 전무를 두려워했다.
다음 날, 김 전무는 은지를 불렀다. - 어제 무례했어. 상사한테 그런 태도가 어디 있어? 사과해. 은지는 믿을 수 없었다. 성희롱을 한 사람이 사과를 요구하다니. 은지가 침묵하자 김 전무는 - 사과 안 하면 인사 고과 최하위 줄 거야. 그럼 해고 사유가 되지. 은지는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한마디 뱉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김 전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그래, 앞으로 조심해. 여자가 직장 생활 오래 하려면 유연해야 해. 은지는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혔다.
은지는 인사팀에 신고했다.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인사팀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김 전무님이 그러셨다고요? 증거 있어요? 은지가 - 회식 때 많은 사람들이 봤어요, 하자 팀장은 - 그분이 우리 회사 실세예요. 조심하셔야 해요. 일주일 후, 김 전무가 은지를 불렀다. - 인사팀에 찌르고 다녔다며? 은지가 놀라자 김 전무는 - 다 내 사람이야. 감히 나를 신고해? 은지는 배신감을 느꼈다. 회사는 은지를 보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 편에 섰다.
김 전무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은지의 업무량은 두 배가 되었다. 야근과 주말 출근이 일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평가는 최하위였다. 김 전무는 - 능력이 부족해. 다음 달까지 개선되지 않으면 해고 검토하겠어, 하고 통보했다. 은지는 매일 아침 출근하기가 두려웠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가슴이 조여왔다. 회사 건물이 보이면 구역질이 났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은지는 웃으며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가면을 쓰는 것이 생존 전략이었다.
결국 은지는 쓰러졌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탈진이었다. 병원에서 의사가 - 번아웃 증후군이에요. 당분간 쉬셔야 해요, 하고 말했다. 하지만 은지는 다음 날 출근했다. 병가를 내면 해고 사유가 될 것 같았다. 어머니가 은지의 변화를 눈치챘다. - 은지야, 무슨 일 있니? 많이 야위었어. 은지는 - 괜찮아요. 일이 좀 많아서, 하고 답했다.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그리고 자신이 약해 보일까 봐.
은지는 녹음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김 전무의 폭언과 성희롱을 몰래 녹음했다. 증거를 모았다. 동료들의 증언도 확보했다. 비록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몇몇은 은지를 지지했다. - 참 안됐어. 김 전무가 너무해.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느 날, 김 전무가 은지를 창고로 불렀다.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 우리 화해하자. 내가 너무했어. 그러면서 은지에게 다가왔다. 은지는 뒷걸음질 쳤다. 김 전무가 - 도망가지 마. 잠깐만, 하며 은지의 팔을 잡았다. 은지는 팔을 뿌리치고 소리쳤다. - 하지 마세요! 저한테 손대지 마세요! 김 전무가 당황했다. - 왜 이래? 조용히 해. 은지는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 - 다 녹음했어요. 고소할 거예요. 김 전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음 날, 은지는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김 전무는 은지를 불렀다. - 고소 취하해. 합의금 줄게. 은지는 고개를 저었다. - 싫습니다. 전 정의를 원해요. 김 전무가 - 넌 이 업계에서 끝이야. 내가 소문내면 어디도 못 가, 하고 협박했다. 은지는 두려웠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은지는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 법을 알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는 법을 알았다. 은지는 김 전무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 해보세요. 전 끝까지 갈 거예요.
퇴사하는 날, 몇몇 동료들이 은지를 조용히 찾아왔다. - 고생 많았어. 용기 있어. 우리는 못했는데. 한 여직원은 울면서 - 나도 당했어. 근데 참았어. 넌 대단해, 하고 말했다. 은지는 그들을 안았다. 모두가 피해자였다.
집에 돌아온 은지는 부모님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어머니가 울었다. - 우리 은지가 그런 일을... 내가 몰라줘서 미안해. 아버지는 분노했다. - 그 놈을 찾아가겠어. 하지만 은지는 - 제가 해결할게요. 법적으로, 하고 말했다.
회사를 그만뒀다. 1년 반 만이다. 직장 내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터졌다. 후회는 없다. 비록 실업자가 되었지만, 자존심은 지켰다. 이것도 일종의 승리다. 굴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무기다.
재판 준비가 시작되었다. 변호사는 - 증거가 확실해요. 이길 수 있어요, 하고 말했다. 하지만 은지는 알았다. 이기더라도 잃을 것이 많다는 것을. 그래도 은지는 나아갔다. 누군가는 싸워야 했다. 변화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