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가 회사를 그만두고 재판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떨리고 불안정했다. - 좀 만날 수 있어? 급한 일이야. 은지는 걱정이 되어 약속 장소로 나갔다. 대학가의 작은 카페였다. 준호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준호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대기업에서 해고되었다는 것이었다. 입사 1년 만이었다. 이유는 업무 태만과 근무 태도 불량. 하지만 준호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 상사가 나를 찍었어. 내가 박사 출신이 아니라고. 학부생 출신이라고 무시했어.
은지는 아이러니를 느꼈다. 준호는 서울대 출신이었다. 그런 준호도 차별을 당한다니. 준호가 계속 말했다. - 게다가 나보다 못한 연세대 출신이 임원 아들이래. 그 놈이 내 프로젝트를 가로챘어. 내가 항의하니까 태도 불량으로 몰았어. 준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커피잔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 나 이제 어떡해? 이력서에 1년 만에 해고당한 거 쓰면 어디도 안 받아줄 거야. 은지는 준호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축축했다. 한때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준호가 이렇게 무너져 있었다.
고모는 준호의 해고 소식에 무너졌다. - 우리 준호가 대기업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이혼 후 준호의 성공만을 기다리며 살았던 고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고모는 은지에게 전화해서 울면서 말했다. - 은지야, 준호 좀 도와줘. 네가 경험이 많으니까.
준호는 재취업을 시도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다른 대기업은 1년 만에 해고된 이력을 의심했고, 중소기업은 서울대 출신이 왜 여기 오냐며 거부했다. 준호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한 달, 두 달, 석 달. 시간이 갈수록 준호의 눈빛은 흐려졌다.
은지는 준호를 자주 만났다. 카페에서, 공원에서, 때로는 한강변에서. 준호는 말했다. - 나 왜 이렇게 됐을까? 할머니가 그렇게 아껴주셨는데. 엄마가 그렇게 투자했는데. 나는 실패작이야. 은지는 - 아니야, 우린 아직 젊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하고 위로했지만 준호의 표정은 어두웠다.
결국 준호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약을 먹기 시작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했다. 고모가 - 준호야, 밖에 좀 나가. 운동이라도 해, 하고 권했지만 준호는 - 나가기 싫어. 사람들이 날 비웃는 것 같아, 하고 답했다.
은지는 준호에게 제안했다. - 나랑 같이 창업 준비해볼래? 나도 회사 그만뒀잖아. 우리 뭔가 해보자.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 작은 빛이 돌아왔다. - 창업? 무슨? 은지가 - 아직 구체적이진 않지만,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거 찾아보자. 두 사람은 창업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하고, 창업 박람회를 다녔다. 준호가 조금씩 활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창업 자금이 없었다. 은지는 저축이 거의 없었고, 준호도 마찬가지였다. 고모는 이혼 후 여유가 없었다.
준호가 은행 대출을 알아봤지만 거절당했다. 신용도가 낮고 담보가 없었다. 정부 지원 사업도 조건이 까다로웠다. 준호는 다시 좌절했다. - 역시 안 되는구나.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은지도 막막했지만 - 방법을 찾아보자. 포기하지 말자, 하고 격려했다.
어느날, 준호가 갑자기 사라졌다. 고모가 울면서 전화했다. - 준호가 없어졌어. 편지만 남기고. 편지에는 ‘미안해요.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라고 적혀 있었다. 은지는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 가족들이 준호를 찾아 나섰다. 경찰에 신고하고,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은지는 준호가 갈 만한 곳을 떠올렸다. 대학 시절 자주 가던 산. 은지는 그곳으로 갔다. 산 중턱 정자에 준호가 앉아 있었다. 소주병이 여러 개 널려 있었다. 은지가 다가가자 준호가 말했다. - 나 죽고 싶어. 살 이유가 없어. 은지는 준호 옆에 앉았다. - 죽지 마. 네가 죽으면 고모는 어떡해. 준호가 울기 시작했다. - 엄마한테 미안해. 할머니한테도 미안해. 모두의 기대를 배신했어. 은지는 준호를 안았다. - 넌 배신하지 않았어. 그냥 실패했을 뿐이야. 실패는 누구나 해. 나도 실패했잖아. 준호가 - 너는 달라. 너는 강해. 나는 약해. 온실 속 화초였어. 은지가 - 그럼 이제부터 강해지면 돼. 온실 밖에서 사는 법을 배우면 돼.
준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모가 준호를 끌어안고 울었다. - 다시는 그러지 마. 엄마는 네가 있어야 해. 준호도 울면서 - 미안해요, 엄마, 하고 사과했다. 은지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준호도 결국 상처받은 아이구나. 특권이 사라지자 무너진 불쌍한 아이.
준호는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상담사가 - 과도한 기대와 압박이 원인인 것 같아요.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네요, 하고 설명했다. 고모는 자책했다. - 내가 너무 압박했나. 공부하라고, 성공하라고. 준호가 - 아니에요. 제가 못난 거예요, 하며 고개를 숙였다.
은지는 준호에게 아르바이트를 소개했다. 작은 카페였다. 시급 8천 원. 준호는 처음에 거부했다. - 서울대 나와서 카페 알바라니. 하지만 은지가 - 일단 해봐. 돈을 벌면서 생각해보자, 하고 설득했다. 준호는 마지못해 시작했다. 카페 일은 힘들었다. 손님들이 무시하기도 했다. - 커피 왜 이렇게 늦어? 장사 이따위로 할 거야? 준호는 참았다. 처음으로 을의 입장이 되어봤다. 돈을 받고 감정노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다. 은지가 겪었을 고통이 조금씩 이해되었다.
2010년 새해, 준호는 많이 변해 있었다. 겸손해졌고 성실해졌다. 카페 사장이 - 준호 씨, 정직원 해볼래요? 하고 제안했다. 월급 150만 원. 준호는 수락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노동으로 정식 직장을 얻은 것이다. 비록 작은 카페지만.
준호가 은지에게 말했다. - 이제 알겠어. 왜 너가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지. 바닥에서 시작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은지가 - 이제 알았구나, 하고 웃자 준호도 웃었다. - 늦었지만 제대로 시작해볼게. 바닥에서부터.
준호가 추락했다. 하늘에서 땅으로. 13층에서 지하로. 하지만 이것이 진짜 시작일지도 모른다. 환상 없이, 특권 없이, 맨몸으로 서는 법을 배우는 것. 준호는 이제야 어른이 되고 있다.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성장통이다.
그해 봄, 준호는 야간 대학원에 등록했다. 경영학을 다시 공부하기로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힘들었지만 충실했다. 고모가 - 우리 준호 달라졌어. 든든해졌어, 하고 말했다. 은지도 동의했다. 준호는 더 이상 온실 속 화초가 아니었다. 거친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