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소년

by 부소유

초등학교 4학년 봄,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교실로 돌아가던 나는 본관 2층 복도를 걷고 있었다. 땀에 젖은 셔츠가 등에 달라붙어 불쾌했고, 급하게 마신 물이 아직도 목구멍에서 출렁거렸다. 복도 끝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왁스 칠한 바닥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엔 역광 때문에 실루엣만 보였다. 가늘고 작은 형체가 빛을 등지고 천천히 다가왔다. 몇 걸음 더 가까워지자 그 형체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나는 걸음을 멈출 뻔했다.


그 아이의 피부는 종이처럼 하얬다. 아니, 종이보다도 더 창백했다. 마치 빛이 피부를 통과해 지나갈 것만 같은 투명함이었다. 목덜미와 팔뚝에 푸른 혈관이 나뭇가지처럼 비쳐 보였다. 서양 아이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분명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작은 얼굴에 유독 큰 눈이 인상적이었는데, 두꺼운 안경 렌즈가 그 큰 눈을 더욱 확대시켜 보이게 했다. 검은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이마를 덮고 있었지만, 그 머리카락조차 가늘어서 두피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우리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 아이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가 유리구슬처럼 맑았다. 그 눈빛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나를 꿰뚫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시선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가는 목과 좁은 어깨, 막대기처럼 얇은 팔다리가 교복 속에서 헐렁거렸다. 걸음걸이는 느렸지만 어딘가 당당했다. 마치 자신의 특이한 외모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교실로 돌아온 뒤에도 그 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수업 시간 내내 연필을 굴리며 생각했다. 저렇게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병에 걸린 건 아닐까. 아니면 정말 혼혈일까.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이 있었다. 강렬하면서도 슬픈, 그러면서도 장난기 어린 복잡한 눈빛.


그 뒤로도 복도에서 몇 번 더 마주쳤다. 늘 혼자 걷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슬며시 시선을 훔쳤다. 때로는 도서관 앞에서, 때로는 급식실 가는 길에서, 때로는 하교 시간 현관에서. 그 아이도 나를 의식하는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다만 스쳐 지나갈 때마다 희미한 비누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는 다른, 깨끗하지만 어딘가 공허한 냄새였다.


5학년이 되어도 우리는 같은 반이 되지 못했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모르는 척 지나쳤다. 가끔 그 아이가 보건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 한 번은 양호 선생님이 그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재는 것을 목격했다.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며칠 뒤 다시 본 그 아이는 여전히 당당하게 복도를 걸었다. 오히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짓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미소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투명한 피부 아래로 흐르는 파란 핏줄이 오히려 강렬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6학년이 되던 3월, 드디어 우리는 같은 반이 되었다. 새 학기 첫날,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맨 앞줄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그 아이가 보였다. 가까이서 본 그 아이는 더욱 특별했다. 투명한 피부 위로 솜털이 햇빛에 반짝였고, 목 언저리에는 작은 점들이 별자리처럼 흩어져 있었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닦는 모습을 봤는데, 안경 없는 얼굴은 더욱 어려 보였다. 아니, 어리다기보다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김민수, 김수진, 김영희... 그리고,


- 김명상.


그 아이가 손을 들었다. 명상이라는 이름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이름마저 특이했다. 하지만 어딘가 그 창백하고 투명한 아이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마치 정말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은, 혹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아이에게.


자기소개 시간이 되었다. 한 명씩 일어나 이름과 취미, 장래 희망을 말했다. 대부분 축구 선수, 대통령, 선생님 같은 평범한 대답들이었다. 김명상의 차례가 되었다. 그 아이는 천천히 일어났다. 예상보다 키가 작았다. 아니, 작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작게 축소된 사람 같았다.


- 안녕하세요. 김명상입니다. 밝을 명에 생각 상을 씁니다. 취미는 책 읽기고요, 장래 희망은...


잠시 멈췄다가 그 아이가 말했다.


- 작가에요.


교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몇몇 아이들이 킥킥거렸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절실함 같은 것이. 선생님도 뭔가 느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다음 학생을 지목했다.


수업이 끝나고 첫 쉬는 시간, 나는 의자에 앉아 김명상을 훔쳐봤다. 그 아이는 가방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표지가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오래된 책인 것 같았다.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이 나뭇가지처럼 가늘었다. 손톱 밑의 핏줄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갑자기 김명상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 아이가 책을 덮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내 자리로 걸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비누 냄새가 더 진하게 났다. 아니, 비누라기보다는 약품 냄새에 가까웠다. 병원에서 나는 그런 냄새.


그 아이가 내 책상 모서리에 손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안경 너머로 큰 눈이 나를 들여다봤다. 검은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작게 비쳤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예상외로 굵고 또렷했다.


- 야, 뭘 자꾸 쳐다봐?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