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by 부소유

2002년 여름, 김명상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새벽 1시였다.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 받았더니 김명상의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방송국 편집실에서 밤을 새우고 있다고 했다. 내일 방송될 예능 프로그램 자막을 쓰고 있다고. 목소리에 피로가 묻어났지만 동시에 흥분도 느껴졌다.


케이블 방송국은 상암동에 있었다. 김명상은 매일 첫차를 타고 출근했다. 막내 작가라서 제일 먼저 와서 선배들 책상을 정리하고, 커피를 타고, 신문을 스크랩해야 했다. 월급은 80만 원. 교통비와 식비를 빼면 거의 남는 게 없었다. 하지만 김명상은 행복해 보였다.


8월의 어느 날, 김명상이 일하는 모습을 보러 방송국에 갔다. 로비에서 기다리니 김명상이 나타났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더 말랐다.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였고, 목이 가늘어서 셔츠 칼라가 헐렁했다. 하지만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작가실로 안내받았다. 좁은 공간에 책상 여섯 개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김명상의 자리는 구석이었다. 책상 위에는 대본, 큐시트, 포스트잇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 옆에는 비타민과 진통제가 보였다.


- 이게 내가 쓴 거야.


김명상이 대본을 보여줬다. 빨간 펜으로 수정한 흔적이 가득했다. 선배 작가들이 거의 다 고쳤다고 했다. 원래 글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녹화실을 구경시켜줬다. 스튜디오는 생각보다 작았다. 카메라 세 대와 조명 장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개그맨들이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김명상이 쓴 대본을 읽고 있었다. 가끔 애드리브를 넣으며 웃겼다.


- 내가 쓴 걸 저 사람들이 말해. 신기하지 않아?


김명상이 속삭였다. 자부심이 느껴졌다. 비록 많이 수정됐지만, 김명상의 아이디어가 전파를 타고 시청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었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김명상은 죽을 먹었다. 위가 좋지 않아서 고형식을 못 먹는다고 했다.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았다.


- 어제도 새벽 4시에 퇴근했어. 그리고 9시에 다시 왔지.


김명상이 죽을 떠먹으며 말했다. 하루 4시간도 못 자는 생활이었다.


가을이 되자 김명상의 프로그램이 정규 편성되었다. 시청률은 낮았지만 매니아층이 있었다. 김명상이 쓴 코너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막내 작가’에서 ‘김명상 작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은 점점 나빠졌다. 10월에 또 병원에 입원했다. 과로로 쓰러진 것이었다. 일주일 입원했다가 퇴원하자마자 다시 방송국으로 갔다. 의사가 말렸지만 김명상은 듣지 않았다.


- 지금 아니면 언제 해. 시간이 없어.


김명상이 병실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링거를 맞으면서도 노트북으로 대본을 쓰고 있었다.


연말 방송 대상 시상식이 있었다. 김명상의 프로그램이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김명상이 자랑스럽게 초대장을 보여줬다. 시상식장에서 본 김명상은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너무 말라서 옷이 헐렁했지만, 표정은 밝았다. 레드카펫을 걸을 때 휘청거렸다. 옆에서 부축하려 했지만 김명상이 손사래를 쳤다.


- 괜찮아. 오늘은 멋있게 걸을 거야.


이듬해 봄, 김명상이 메인 작가가 되었다. 새로운 파일럿 프로그램을 맡게 된 것이었다. 토크쇼 형식의 심야 프로그램이었다. 김명상이 기획부터 참여했다고 했다.


- 드디어 내 이름이 메인 작가로 올라가.


김명상이 전화로 흥분해서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기침 소리도 자주 들렸다.


첫 방송을 앞두고 김명상이 또 쓰러졌다. 이번에는 심각했다. 폐렴과 함께 여러 장기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중환자실에 일주일 있었다. 병문안을 갔을 때 김명상은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말을 할 수 없어서 수첩에 글을 썼다.


- 방송 잘 됐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명상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또 썼다.


- 대타 작가가 잘하고 있대. 다행이야.


자기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한 것인데도 안도하는 김명상이 안쓰러웠다.


퇴원 후 김명상은 방송국에 복귀하지 못했다. 의사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방송국에서도 건강을 회복한 후에 오라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김명상이 다시 돌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집에서 요양하던 김명상을 찾아갔다. 방에는 대본과 책들이 쌓여 있었다. 김명상은 침대에 누워서도 글을 쓰고 있었다.


- 드라마 대본 공모전에 낼 거야.


김명상이 노트북을 보여줬다. 화면에는 대본이 떠 있었다. 제목은 ‘마지막 봄날’. 시한부 청년의 사랑 이야기였다.


- 주인공이 누구랑 닮았네.


내가 말하자 김명상이 웃었다.


- 당연하지. 우리 이야기니까.


하지만 김명상은 그 대본을 끝내지 못했다. 여름이 오기 전에 다시 입원했다. 이번에는 더 오래 병원에 있어야 했다.


병실에서 김명상이 말했다.


- 방송작가... 정말 하고 싶었는데...


눈물이 고였다. 처음으로 보는 좌절이었다. 김명상은 항상 희망을 말했는데, 이제는 포기를 말하고 있었다.


-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나으면 다시...


내가 위로했지만 김명상은 고개를 저었다.


- 알아. 이제 안 된다는 거. 몸이 못 따라줘.


창밖을 보며 김명상이 말했다. 병원 창밖으로는 방송국 송신탑이 보였다. 김명상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가을이 되었을 때, 김명상이 쓴 대본 중 하나가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15분짜리 단막극이었다. 김명상과 함께 라디오로 들었다. 성우들의 목소리로 김명상의 대사가 흘러나왔다.


- 이거라도 전파를 탔네.


김명상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비록 작은 성취였지만, 김명상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방송작가의 꿈을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꿈의 조각이라도 실현한 것이었다.


그것이 김명상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방송작가 김명상은 거기서 멈췄다. 하지만 김명상이 쓴 글들, 김명상이 꾸었던 꿈들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실현되지 못한 채로, 미완성인 채로.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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